지역의 첫 ‘문화카페’로 불렸던 ‘도시의 광야’에서 선장역을 맡은 장성길씨가 5년전부터 더치커피 전문 겸 다목적 문화사랑방 ‘엘모’의 으뜸 머슴으로 ‘재밌는 인문학 공동체’를 개척 중이다. |
“내가 꿈꾸는 ‘문화’가 있다.”
짧은 인생,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 그러려면 상품이 아니고 작품 같은 ‘분위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분위기가 바로 ‘문화’다. 문화의 진원지는 ‘카페’라고 믿는다. 프랑스의 카페에서 철학이 태어났고 혁명이 태어났다. 대구에서도 그런 문화의 전위대 같은 카페를 만들어 일과 꿈이 공존하는 사랑방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항상 돈이 문제다. 지금 난 돈 때문에, 물론 내 욕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대구 곳곳에 9개 가맹점을 갖고 있는 엘모(ELMO)의 주인장인데도 말이다. 대구 중구 삼덕동 2가 삼덕소방서 뒤편 골목에 내 아지트가 있다. 빌딩 3~4층을 임차해 쓰고 있다. 3층은 더치전문 스터디 카페다. 5년 역사의 엘모는 커피명가, 다빈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 대구발 커피 브랜드와 거리를 둔다. 커피문화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토핑하려고 노력한다.
2012년 동성로 로데오 거리에 ‘스터디 카페’라니. 그건 기성세대한테는 ‘불장난’, 청년들에겐 돌직구 같은 ‘맘의 탈출구’였다.
4층은 다목적 문화사랑방. 내가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 현재 멀티플 아이디어맨인 안경숙 대구 중구보건소장과 의기투합해서 ‘문화난장판’을 만들 작정이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고, 요리도 배우고, 커피도 배우고, 원어민과 커피를 마시면서 영어를 익히고, 공연도 하고, 인문학 세미나도 하고, 영화모임도 갖는 것이다. 때론 못 마땅한 시국에 대해 토론도 해보자는 것이다.
그 1탄으로 지난해 11월22일 ‘조폭마누라’란 영화를 만들어 인기를 얻은 영남대 회화과를 졸업한 조진규 감독을 초청, ‘커피 & 토크’란 시간을 가졌다. 엘모는 노무현 대구 추모카페로도 유명하다. 올봄에도 추모 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다문화 이벤트 열고
요리 교실 마련하고
커피 드립도 배우고
인문학 강좌도 갖고’
나는 ‘커피문화’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
토핑'하며 살아간다
장성길 사장은 1998년 삼덕교회에서 운영한 ‘도시의 광야’의 매니저를 하면서 처음 커피와 인연을 맺었다. ‘커피’를 만나기 전엔 3년간 우동·김밥장사도 했다. ‘엘모’는 그의 인생 제2라운드인 셈이다. |
◆메트로 지하상가에서 시작된 엘모의 반란
엘모의 시작은 ‘엘머’라는 동화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008년 7월. 경북대 사대부고 옆 메트로 지하상가에서 엘머라는 작은 카페를 준비하게 되었다. 수중엔 단돈 140만원밖에 없었다. 보증금 100만원에 40만원 갖고 일을 벌였다.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 싱크대 등 모든 물품은 길에서 주워 온 것이었다. 원래는 카페가 목적이 아니었다.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공방을 계획했다. 그런데 온도나 환경이 맞지 않았다. 초보자인 나에게는 무리였다. 그래서 아이스바와 간단한 음료부터 팔기로 했다. 첫날 매출은 1만1천원. 나중에는 100배로 매출이 폭증했지만 지하교회 카타콤 같은 지하 엘모 시절이었다.
초창기엔 수염도 길렀고 머리도 말총머리였다. 어떤 사람은 날 신비주의 교주로 착각하기도 했다.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 붙어 있었다. 말벗은 경대 사대 부설 초·중·고 학생들이었다.
6개월 동안은 하루 매출이 5만원 선이었다. 그래도 짜릿한 행복이 나를 엄습한 나날이었다.
엘머는 동화책 속에 나오는 코끼리 이름이다. 2년 전 상표등록을 위해 엘머가 엘모로 바뀐 것. ‘엘(EL)’은 히브리어로 ‘신’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엘모가 신의 커피숍은 아니다. 우연인지 네덜란드에도 엘모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커피를 손에 대기 전 남구 대명동 옛 계명대 캠퍼스 근처에서 3년간 우동·김밥 장사를 했다. 오픈 전까지 나는 그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상호는 ‘장성길 우동김밥 전문점’. 참 간이 큰 놈이었다. 그래도 나라별 김밥 아이디어까지 짰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을 시작한다는 것, 그런데 내 열정 덕인지 손님이 제법 많았다. 더치커피도 마찬가지다. 머신이 없어 더치를 시작했고 케이크도 모르고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서 계속 만든 것뿐이다.
원래 더치커피에 손을 댄 것은 돈이 없어서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커피를 찾았지만 머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치를 시작했다. 하루에 내리는 양도 한정돼 있었다. 손님이 늘었다. 케이크를 찾는 사람도 늘었다. 누가 만든 걸 팔았는데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만들었다. 반응이 좋았다. 외국에서 배웠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1년쯤 도피처로 시작되었던 카페가 지금까지 뻗쳤다. 그렇다고 내가 커피를 많이 아는 전문가는 아니다.
◆도시의 광야 선장
1998년 11월1일이 내 커피 생일이다.
삼덕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시의 광야’ 선장(매니저)으로 일하면서 커피가 내 운명이 된다. 내가 원두를 처음 접한 건 시내 커피명가에서였다. 생크림이 올라간 ‘명가치노’를 잊을 수 없다.
삼덕교회 담임목사였던 김태범 목사가 작명한 ‘도시의 광야’는 ‘민들레 영토’보다 빨랐다. 대구 문화카페의 리더격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기독교가 축이었지만 워낙 운영 시스템이 자유로워 종교와 상관없는 공간이었다. 매주 토요일 이런저런 공연이 있었다. 전국 유명 CCM 가수는 거의 거쳐갔다. 책과 토론과 공연이 있었다. 정말 도시 속에서 탈도시적 기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도 다들 나를 ‘선장’이라고 부른다. 도시의 광야에서의 선장질은 무려 10년 지속됐다.
나에게 엘모는 ‘제2의 광야’였다.
모든 게 낯설었다. 세속적 욕망, 비즈니스적 계획과 구상에 의해 그 광야에 온 게 아니다. 내 열정과 순수함을 믿는 조물주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몰고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야 천직(天職)과 천명(天命)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치커피만 고집하지 않는다. 일회용 믹스커피면 어떻나. 우린 자칫 기회식품에 걸려 그다음 문화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화적이지 못하고 소비적인 청춘에 머문다면 어떻게 신자유주의의 격랑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엘모는 ‘적지만 더 행복한 세상을(The Less But The More Happiness)’ 겨냥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더치커피의 유래
네덜란드가 18세기초 인도네시아에 커피농장을 조성한 후 수확한 생두를 배로 운반하는 과정에 선원들에 의해서 고안되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출발해 태평양·인도양·대서양을 거쳐 네덜란드로 가는 도중 배안에서는 뜨거운 물이 귀했다. 상온의 물로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지금과 같은 방법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더치커피 원두를 아라비카 종이 아니라 ‘로부스타’ 종으로 추출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에 세계적으로 커피혁명이 일어났는데 인도네시아 농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아라비카 커피나무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때 아라비카에 비해 병해충에 강하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며 수확량이 많은 로부스타가 대박이 났다. 그러나 비엔나에 비엔나 커피가 없듯, 더치커피의 나라인 인도네시아나 네덜란드에 가면 실제로 더치커피를 만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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