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9] 강릉 선교장 ‘활래정’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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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2-11   |  발행일 2013-12-11 제20면   |  수정 2013-12-11
호수와 바다 사이 ‘천상의 세계’서 활력을 찾다
추사·흥선대원군·김구 등 수많은 고관·시인묵객 찾아와 휘호 남긴 곳…
주자의 시 구절 ‘活水來’서 이름 따와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9]  강릉 선교장 ‘활래정’
주인의 넉넉한 인심 덕분에 조선 후기 수많은 시인묵객이 부담 없이 드나들며 교유하던 활래정 모습. 건물 처마 사방에 ‘활래정’ 편액이 6개나 걸려 있다.


아름다운 정자로 소문난 강릉의 활래정(活來亭). 조선 후기의 명문가 고택인 ‘선교장(船橋莊)’에 있는 정자다. 선교장 본채 뒤를 둘러싼, 나지막한 산에 펼쳐진 멋진 노송 숲과 정자, 정자 앞의 넓은 연못이 어우러져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이곳은 주인의 넉넉한 인심에다 뛰어난 풍광 덕분에 고관이나 시인묵객이 끊임없이 드나들던 명소였다.

특히 지리적 환경 덕분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구경하기 위해 가는 시인묵객이 많이 드나들며 교류하던 공간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하도 많이 드나들어 선교장 행랑채에는 서화를 표구하는 장인이 상주하고 환자를 돌보는 의원을 둘 정도였다.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이하응 등 많은 유명 인사도 이곳에 드나들며 휘호를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선교장을 찾았고, 최근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IOC위원들을 위한 차회(茶會)가 활래정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랬던 공간인 만큼, 활래정에 올라보면 처마나 기둥에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편액과 주련이 가득 걸려있다. 특히 사방 처마 곳곳에 다양한 ‘활래정’ 편액이 6개나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9]  강릉 선교장 ‘활래정’
추사 김정희가 활래정에 들러 남긴 글씨 편액 ‘홍엽산거(紅葉山居)’.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9]  강릉 선교장 ‘활래정’
정자에 걸려 있는 6개의 ‘활래정’ 편액.

◆6개나 걸린 ‘활래정’ 편액

대관령에서 뻗은 산줄기가 낮아지고 부드러워진 능선이 선교장 뒤편을 두르며 ‘청룡’과 ‘백호’를 이룬다. 활래정은 그 청룡 끝에 자리 잡고 있고, 정자 앞에는 넓은 연못이 펼쳐진다. ‘ㄱ’자 형태인 정자 건물의 반이 연못에 뿌리박은 돌기둥 위에 세워져 한층 더 운치가 있다.

연못가를 지나 활래정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나타나는 데 ‘월하문(月下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편액 아래 양 기둥에 2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읊은 시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枯月下門).’

월하문에 걸리 이 시구의 의미는 ‘늦은 저녁 선교장을 찾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월하문을 두드리십시오.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월하문을 통과하면 바로 활래정을 눈앞에 마주하게 된다. 이쪽에서 마주하게 되는 ‘활래정’ 편액은 흰 바탕에 금색 행서(行書)로 돼 있는데, 규원(葵園) 정병조(1863~1945)의 글씨다. 동궁(東宮) 시종관(侍從官)을 지낸 학자로, 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특히 행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그 옆면에는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의 예서체 글씨 ‘활래정’이 걸려 있다. 흰 바탕에 초록색 글씨다. 해강은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가였다.

귀퉁이를 돌아가면 합죽선 모양의 ‘활래정’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규원의 작품으로, 쪽빛 바탕에 흰 행서 글씨다.

연못 쪽 처마에도 세 개의 ‘활래정’ 편액이 걸려있다. 성당(惺堂) 김돈희(1871~1937)와 성재(惺齋) 김태석(1875~1953)의 글씨와 함께 규원 정병조의 글씨가 하나 더 있다. 성당의 글씨 편액이 가장 크다. 성당 김돈희는 당대의 대표적 서예가이고, 성재 김태석 역시 유명한 서예가로 전서·예서·해서와 전각에 뛰어났다. 일찍부터 협기(俠氣)와 풍류로 알려진 성재는 중국에 갔을 때 위안스카이의 옥새(玉璽)를 새겼고, 그의 서예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 등 많은 비명을 남겼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도 만년에 이곳에 들러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편액으로 만들어져 전해오는데, 지금은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와서 남긴 대련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활래’의 의미는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한 부분이다.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半畝方塘一鑑開)/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안에 떠 있네(天光雲影共徘徊)/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무엇인가(問渠那得淸如許)/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나오기 때문이지(爲有源頭活水來).’

활래정의 ‘활래’라는 명칭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따온 것이다. 활래정은 실제 서쪽 태장봉에서 끊임없이 흘러 내리는 맑은 물이 정자 앞의 연못으로 들어오고 그 물은 다시 경포호수로 빠져나가는 구조다.

운석(雲石) 조인영(1782~1850)이 지은 활래정 기문(記文)을 통해 그 의미를 더 잘 엿볼 수 있다.

“…옛날 내가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호수를 지나는데 백겸(伯兼: 활래정을 지은 이후)과 만나 술병을 쥐고 달밤에 배를 띄웠다. 이어서 선교장을 방문하고 즐겁게 놀았다. 매번 여기에 집터를 정하고 동도주인(東道主人)이 될 것을 기약하였다. 비록 세상의 흙먼지 속에 출몰하느라 스스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호수와 바다 사이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금년 가을 백겸이 와서 말했다.

‘선교장 옆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전당연(錢塘蓮: 중국 명나라 난징의 전당지(錢塘池)에 있던 연(蓮)으로, 강희맹이 조선에 들여와 재배에 성공한 후 점차 전국에 퍼졌다고 함)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은 뒤, 주자의 시 구절인 ‘활수래(活水來)’에서 ‘활래’를 가져와 편액 이름으로 하였네.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며 스스로 즐거워하는데, 내가 사는 곳은 그대도 감상한 적이 있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짓지 않겠는가.’

내가 말했다. ‘주자는 마음을 물에 비유하였는데 물은 본디 허경(虛境)일세. 지금 그대는 참으로 이렇게 맑고 잔잔한 물을 활력 있는 물이라고 하는가. 물이라 이름 붙인 것은 모두 활력 있는 것일세. …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본디 활력이 있으나 활력이 없음을 근심하는 것은 외물이 누를 끼치기 때문이네. 벼슬하는 사람은 총애를 잃을까 근심하고, 서민은 이익을 쫓아다니고, 선비는 옷과 음식을 마련하고 배와 수레를 탈 만 한 돈이 없지. 백겸은 그렇지 않네. … 낙토에서 살며 명소에 자리 잡아 이미 스스로 쇄락하여 구애받을 것이 없네. 그래서 영동의 여러 명승을 마음껏 유람하고는 높은 산과 큰 바다도 도리어 싫증이 나자, 여기 이 정자에 자취를 거두고 기심(機心: 꾀를 부리는 마음)을 없애 자기 마음에 활력을 부치기를 원한 것이라네. 그러니 마음에 맞는 곳이 멀리 있지 않으며, 작은 연못의 조그만 물도 호수와 바다가 될 수 있다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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