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의 상징 ‘선교장’ 代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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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2-11   |  발행일 2013-12-11 제20면   |  수정 2013-12-11

오죽헌과 경포대 중간쯤에 위치한 선교장(강릉시 운정동)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8∼81)이 300년 전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100년에 걸쳐 증축했다. 본채만 102칸이나 되는 대규모 주택이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집 앞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집’으로도 불리는 선교장(船橋莊)에 들어서면 맨 먼저 연못 위의 정자 활래정이 반긴다.

강릉 해변에서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한 이내번은 영동 일대를 개간해 대농장을 만들어 농민에게 제공했다. 남쪽으로는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속초와 양양, 서쪽으로는 횡성과 평창까지 선교장의 농토였다고 한다.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영동 일대에 다섯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여느 고택과 달리 집 이름에 ‘당(堂)’이나 ‘각(閣)’ 대신 ‘장(莊)’을 붙인 것도 독립영지를 가진 유럽의 귀족처럼 자급자족 경제시스템을 갖춘 장원(莊園)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장의 주인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만 한 것이 아니라, 경주 최부잣집처럼 나눔과 상생의 삶을 추구해 농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선교장을 공격한 농민군을 물리친 세력이 선교장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한 소농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교장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 비견되기도 한다.

활래정은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가 1816년 세운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이후의 증손인 경농(鏡農) 이근우(1877~1938)가 중건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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