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8]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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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27   |  발행일 2013-11-27 제20면   |  수정 2013-11-27
소박하고 단아한 ‘한글’이 客을 반기다
불교 대중화의 상징적인 사찰…평생 불경 한글화 사업 천착한 운허 스님의 魂 담겨있어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8]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한글 편액과 주련이 걸린 봉선사 큰법당(대웅전). 운허 스님의 뜻으로 1970년에 걸린 ‘큰법당’ 편액은 최초의 대웅전 한글 편액이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8]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운허 스님 글씨인 ‘운악산봉선사’.


조선 세조(1417~68) 왕릉인 광릉(光陵) 부근에 있는 봉선사(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사찰 이름은 1469년(예종 1),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세조가 승하하자 운악산 아래에 능을 마련한 뒤, 능을 보호하기 위해 폐찰이 된 기존의 사찰터에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새로 정한 이름이다. 예종이 사찰 편액을 내린 ‘봉선사(奉先寺)’는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며 명복을 빌고 선왕을 받드는 사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봉선사’ 편액은 예종이 직접 써서 내렸다고 한다.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선사대종을 같은 해에 주조했다.

969년(고려 광종 20) 법인(法印)국사 탄문이 창건했을 당시는 산의 이름을 따 운악사(雲岳寺)라 불렀다.

이 봉선사에 가면 한문으로 된 편액이나 주련 때문에 주눅이 들지 않아도 된다. 전각의 편액이나 주련이 대부분 한글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 한글화 사업에 평생을 바친 승려인 운허(耘虛) 용하(1892~1980) 덕분이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8]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봉선사의 한글 편액인 ‘큰법당’은 포항 출신 서예가 운봉 금인석의 글씨다.


◆대웅전에 걸린 한글 편액 ‘큰법당’

다른 사찰과 달리 봉선사는 중심 전각인 대웅전에 걸린 편액 글씨가 ‘큰법당’이다. 한글로 되어 있다. 단정하면서도 원만한, 보는 이들이 모두 좋아할 글씨다.

봉선사는 6·25전쟁으로 1951년 3월에 법당 등 14동 150칸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된 후, 59년에 범종각이 건립된 데 이어 63년에는 운하당(雲霞堂)이 세워졌다. 대웅전인 큰법당은 1970년 당시 주지였던 운허가 중건했다. 운허는 이때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법당’이라 이름 지어 한글 편액을 달았다. 불교 대중화의 뜻을 담은 상징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사찰의 한글 편액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다.

큰법당 내부도 3면 벽에 한글로 된 법화경 동판(125매)과 한문 법화경 동판(227매)을 함께 부착해 놓아 눈길을 끈다.

큰법당 편액 글씨의 주인공은 만년에 구미에서 활동한 운봉(雲峰) 금인석(1921~92)이다. 포항 출신으로 도쿄대 경제과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운봉은 고등고시(행정과)에 합격, 국회 재경위 전문위원까지 역임한 관료 서예가다. 대구의 서예가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를 사사했다 한다. 그는 구미시민헌장, 금오산사적비 등 한글 작품을 비롯해 많은 서예작품을 곳곳에 남겼다.

큰법당 앞에 있는 건물 ‘방적당(放跡堂)’ 편액도 그의 글씨다. 방적당은 ‘발걸음을 자유롭게 놓아준다’는 뜻으로, 첫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다듬는 스님이 사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큰법당 기둥에 걸린 네 개의 주련도 한글로 되어 있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하고’이다. 화엄경에 있는 보현보살의 게송을 운허가 한글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석주(昔珠) 스님(1909~2004)의 글씨다. 서예 글씨를 잘 쓰는 스님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석주 역시 역경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며 운허와 함께 경전 한글화에 매진했다. 그는 자신이 오래 머물렀던 서울 칠보사의 대웅전 편액을 자신이 쓴 한글 ‘큰법당’으로 바꿔 다는 등 한글로 된 편액이나 주련 작품을 많이 남겼다.

큰법당 뒤에 있는 조사전(祖師殿)의 한글 주련 4개도 눈길을 끈다. 내용은 ‘이 절을 처음 지어/ 기울면 바로 잡고/ 불타서 다시 지은/ 고마우신 그 공덕’인데, 운허와 석주의 합작품이다. 운허가 짓고, 글씨는 석주가 쓴 것이다. 아름다운 한 편의 시와 같은 글귀로, 한문 주련 글 못지않게 멋지다. 조사전 편액은 김천 출신으로 진주와 부산에서 활동한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1908~91)의 글씨다.

봉선사에는 운허의 필적도 있다. 2005년에 신축한 일주문에 걸린 한글 편액 ‘운악산봉선사’로 운허 유고에서 집자해 만든 것이다. 정감이 가는, 소박하고 편안한 글씨다.

이 밖에 설법전의 사방 기둥에 걸린 주련과 ‘범종루’ 편액 등도 한글로 되어 있다.



◆불경 한글화 서원한 역경의 화신 운허 스님

‘다음 생에도 다시 태어나 못 다한 역경사업을 하겠다.’

운허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역경 한평생’이었다. 그는 20세 때부터 만주 등지에서 육영사업, 비밀단체 가입, 독립결사 조직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1년 일본 경찰에 발각돼 쫓기던 중 강원도 회양 첩첩산중에 있는 봉일사라는 절로 숨어든 것이 그대로 삭발 출가의 길이 됐다. 출가 전 한학과 신학문 등 학문의 기초를 다진 그는 절 생활에서도 금세 두각을 드러냈다.

봉일사에서 금강산 유점사로 가서 서기 소임을 맡고 있던 운허에 대한 소문이 당대 대표적 학승인 봉선사의 월초(月初) 스님에게 전해졌다. 그를 봉선사로 불러온 월초는 경학공부를 하게 했다. 부산 범어사에서 당대의 대강백 진응(震應) 스님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그의 공부는 일취월장의 진전을 보였다. 다시 개운사의 박한영 스님(1870~1948) 문하에 들어가 경학공부를 또 확고히 다졌다.

운허는 불교가 중흥하려면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을 한글화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해 불경번역의 서원을 세우고 그 실천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61년 국내 최초로 한글판 ‘불교사전’을 편찬한 것을 비롯해 경전 한글화작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는 혼자 힘으로는 방대한 불경을 모두 한글화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역경원 설립을 추진해 64년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동국대 역경원을 개원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대원장으로 취임해 해인사 소장 대장경을 번역하는 대불사(大佛事)에 착수했다. 한글대장경은 2001년 4월에 완간(318권)되었다.

운허의 스승인 월초도 불경 번역과 경전 강의에 일생을 바친 학승이었고, 스승 월초에 이어 운허도 불경 한글화를 통한 불교 대중화에 매진한 것이다. 그 산실이었던 봉선사는 한글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세조 재위 시절 ‘법화경언해’ 등 9종의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주도했던 사찰이기 때문이다. 당시 봉선사에는 간경도감이 설치돼 있었다.

한글과 봉선사는 이처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만큼 봉선사 법당의 편액과 주련이 운허에 의해 한글로 걸리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춘원 이광수와도 인연 깊은 봉선사는

현재의 건물들은 6·25전쟁 이후 복원한 것들이지만, 봉선사에는 세조의 능을 수호하기 위한 왕실의 원찰답게 특별한 전각들이 많다.

판사관무헌(判事官務軒). 세조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御室閣)이 생기면서 어실각을 관리하던 봉선사의 주지는 조선 왕실로부터 봉향판사(奉香判事)의 직위를 받았다. 역대 봉향판사였던 주지가 머물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봉선사 관내에서 행패를 부리는 양반의 기강을 잡는 기구이기도 했다 한다.

큰법당 동쪽에 있는 개건당(開建堂)은 봉선사를 새로 지은 공덕주 정희왕후, 중건 공덕주 계민 스님 등의 위패와 진영을 모시던 영각이다. 어실각은 지금의 지장전 자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어실각’ 편액만 지장전 건물에 걸려 있다.

1469년 봉선사를 새로 지을 때 주조한 봉선사대종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종에 새겨진 글은 명문이자 명필이다. 글씨는 허백당(虛白堂) 정난종(1433~89)이 썼다. 문장은 시·문·서·화 사절로 불리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1424~83)의 작품이다.

봉선사는 최초의 한극 근대소설 ‘무정’으로 유명한 춘원(春園) 이광수(1892~1950)와도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친일변절자로 낙인 찍힌 춘원이 광복 후 어디론가 피신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당시 운허의 도움으로 운허가 머물던 봉선사에 입산하게 된다. 운허는 춘원의 동갑내기 8촌 동생이다. 춘원은 운허가 마련해준 방(茶經香室)에서 법화경을 탐독하고 작품을 쓰며 반 년 정도 머물렀다.

이런 인연으로 봉선사 경내에는 1975년 주요한 등의 제의로 건립된 ‘춘원이광수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춘원이 남긴 글이다. ‘내 삼종제(운허 스님)와 함께 노래와 고풍 한시를 짓는 내기를 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그는 무엇에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를 대할 때 제일 부러운 것은 꾸밈없이 쭉 펴진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

’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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