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7] 안동 송암구택 ‘관물당’‘한서재’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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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13   |  발행일 2013-11-13 제20면   |  수정 2013-11-13
선비는 자연에 묻혀 格物致知의 지혜를 얻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7] 안동 송암구택 ‘관물당’‘한서재’
송암 권호문이 수양하며 시를 짓던 관물당(안동시 서후면 교리). 송암구택(松巖舊宅)에 딸린 건물로, 당호는 스승인 퇴계 이황이 지어준 것이다. 관물당 앞에 한서재가 있다.

‘선비는 무엇을 일삼아야 하느냐 뜻을 높게 가질 뿐이로다/ 과거급제는 내 뜻을 손상시키고 이익과 출세란 덕을 해치는 것이로다/ 모름지기 책 가운데서 성현을 모시고/ 언어와 정신을 맑은 달밤에 잘 가다듬고 고요히 수양하여/ 내 한 몸이 바르게 된다면 어디라도 못 가리오/ 굽어보고 쳐다보아 크고 넓게 포용하는 모습으로 왕래가 편해지니/ 내 갈 길을 알아 뜻을 세우지 아니하리오/ 벽처럼 선 낭떠러지 만 길은 되는데 내 마음은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변하지 않느니/ 뜻이 커서 말하는 것이 시원스러운 데다 책 읽어 아득한 옛 현인을 벗으로 삼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송암(松巖) 권호문(1532~87)의 경기체가 형식의 시가(詩歌)인 ‘독락팔곡(獨樂八曲)’ 중 3연이다. 송암의 삶을 잘 드러내고 있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퇴계로부터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는 평을 들었던 그는 고향 안동의 자연 속에 묻혀 평생 고고하게 산 선비였다. 벗인 서애 류성룡도 송암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불렀다. 자연 속의 한가한 삶을 노래한 그의 연시조 작품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도 유명하다.

이런 삶을 산 송암이 학문을 닦고 심신을 수양하며 시를 짓던 거처가 송암구택(안동시 서후면 교리)의 관물당(觀物堂)과 한서재(寒棲齋)다. 해당 기문(記文)을 통해 ‘강호고사’의 뜻을 살펴본다.


‘江湖高士’ 송암 권호문의 얼 깃든 곳…
“사물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라” 스승 퇴계가 지어준 당호의 숭고한 뜻 실천


◆ 사물을 보며 이치를 깨닫고 수양하던 ‘관물당’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7] 안동 송암구택 ‘관물당’‘한서재’
송암이 지향했던 삶의 철학이 담긴 당호(堂號) 편액 ‘관물당’(위)과 ‘한서재’.

1569년에 지은 관물당에 걸려 있던 처음 당호(堂號)는 ‘관아재(觀我齋)’와 ‘집경당(執競堂)’이었다. 시를 읊조리고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지만,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송암이 지은 것이다. 후에 스승인 퇴계가 이를 보고 당호와 추구하는 삶이 다소 어긋나기에 ‘관물당(觀物堂)’으로 지어주었다. ‘관물’은 개인의 편협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지 말고 사물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나아가 만물에 구비되어 있는 이치로써 사물을 바라보라는 의미다. 즉 개울과 산을 즐기되 거기에 내재된 이치를 살피고, 이를 수양의 바탕으로 삼으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송암이 지은 ‘관물당기(觀物堂記)’의 내용 중 일부다.

“기사년(1569년)에 조카 도가(道可)가 집안 일을 맡고 있었는데, 자못 재력이 넉넉해져서 나의 뜻을 이루어주려 했다. 칠월 농사를 짓다 짬을 내어 목수에게 재목을 모으도록 하고, 송암의 서쪽에 작은 집을 짓기 시작해 넉 달이 걸려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나는 마침 그해에 오랫동안 서울에 있었는데 11월에 돌아와서 보니 처마나 기둥이 높고 견고하게 솟아 있었다. 구조가 비록 내 마음에 흡족하지는 않았으나 그 형세가 탁 트이고 활달해 가히 경치를 구경하거나 자고 하기에 알맞았다.

이듬해 봄에 기와를 덮고 판자로 단장했다. 반은 따스한 온돌방으로 만들고, 반은 시원한 마루를 만들었다. 구석진 벽에는 책을 보관하고 앞쪽의 빈 곳은 난간을 둘렀더니, 시인묵객이 거처할 만했다. 이에 내가 이름을 ‘관아재’라 하고 ‘집경당’이라 했으나,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관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사람이 능히 천지의 만물을 보면서 그 원리를 연구해 알아낸다면 최상의 영물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능히 천지만물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어둡다면 박아(博雅)한 군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堂)에서 어찌 다만 외물만 눈으로 보고 연구하는 실행이 없어서 되겠는가.

… 하나의 사물을 보면 한 가지 사물의 원리가 있을 것이고, 만물을 보면 만물의 원리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근본에서부터 만 가지 특수함으로 분산되기도 하고, 만 가지 특수함을 추리해 하나의 근본으로 이르기도 하나니, 그 유행하는 미묘함이 어쩌면 그다지도 지대할까. 그러므로 사물을 관찰하는 자가 눈으로 관찰하는 것은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만 같지 못하며,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은 원리로서 관찰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만약에 능히 원리로서 관찰할 수 있다면 뚜렷하게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질 것이다.

소자(邵子·송나라 학자로 송대 6군자 중 한 사람)는 이르기를 ‘사람은 천지만물의 도를 능히 알아야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고 했고, 증자(曾子)는 이르기를 ‘앎을 투철히 하는 것은 사물을 규명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진실로 이 집에 거처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에 힘을 들여 사람의 도를 깨닫는다면, 관물당이라 명명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 한서재에서 누리는 8가지 즐거움

송암은 이에 앞서 갓 스물이 된 1551년에 ‘한서재’를 지었다. 이때 남긴 ‘송암한서재기(松巖寒棲齋記)’를 보면 그는 일찍부터 강호에 노니는 것이 본래 취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영가)은 본래 우리 시조의 봉함을 받은 곳으로, 그 산천의 형세는 영남의 으뜸이다. 관아 서쪽 10리 남짓한 곳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름을 송방리라고 한다. 선대로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지가 100여년이나 되었다. …마침 금년 가을 글을 다듬는 여가에 앞쪽 시냇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소나무 밑 아슬아슬한 바위 모서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니, 충분히 깃들어 살 만했다. 이에 산 능선을 깎아 초가를 지었다. 한 칸은 따뜻한 방으로 하고, 두 칸은 시원한 마루로 만들었다.

… 동쪽으로는 모래사장과 시냇물을 누르고 있고, 서쪽으로는 학가산이 읍을 하는 듯이 구부러져 있다. 남쪽은 청성산이 솟아있고, 북쪽은 천등산이 감싸고 있다. 유유자적하며 물상(物象)을 찾아다니노라면 들판의 푸른 풀, 긴 제방의 파란 버들, 봄날의 안개와 가을의 비,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 등이 사시사철의 아름다운 흥취를 제공해 주며 세속의 티끌 묻은 생각을 씻어준다.”

그는 이어 한서재에서 누리는 즐거움 여덟 가지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때때로 상쾌한 바람이 베개 옆으로 불어오고 녹음 그늘이 마루에 드리우면 팔을 베고 조는 것(松陰晝眠)이 그 첫째이고, 봄은 저물어 긴 제방의 수양버들이 어른거리고 꾀꼬리의 지저귐이 바뀔 무렵에 주렴을 걷고 이를 듣는 것(柳幕鶯歌)이 그 둘째다. 들판에 낙조가 드리울 때 작은 삿갓을 쓴 초동이 송아지를 타고 피리를 불며 지나가면 난간에 기대 듣는 것(遠村牧笛)이 그 셋째이며, 물 맑은 냇가에서 발을 씻고 둥근 바위에 기대 앉아 바람결을 맞으며 갓을 벗어놓고 머리를 드러낸 채 시를 읊는 것(岸巾石)이 그 넷째이며, 매우(梅雨)가 그칠 때 미풍이 불어오고 방죽에 푸른 물결이 찰랑찰랑 일면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것(麥浪波)이 그 다섯째다. 봄바람이 따스하여 산뜻하고 고운 천만 가지 꽃들이 원림에 난만하면 축대에 앉아서 구경하는 것(看花臺)이 그 여섯째이고, 여름날이 길어 가시 사립문을 닫고 낮잠을 자는데 이웃의 벗이 문을 두드리면 한가롭게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消日局)이 그 일곱째다. 고요한 밤 그윽한 창가에서 책을 덮고 홀로 앉아 달 그림자가 비치면 거문고에 노래를 실어 회포를 푸는 것(對月琴)이 그 여덟째다. 그리고 궁벽한 곳에 거처하며 가난을 즐기고 도서의 향기로움을 맛보면서, 자신의 뜻을 갈고닦으며 한가롭게 지내다가 이 세상을 마친다면 그 즐거움이 충분할 것이라며 마무리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송암에게 고향의 산 ‘靑城山’은…
“오래 이별하면 늘 꿈속에 들어오고, 정이 붙어 정말 잠시도 떨어질 수 없도다”

송암은 또한 고향의 산인 청성산(靑城山)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청성산은 낙동강이 바로 앞을 지나가는, 높지 않은 산(252m)이다. 그가 지은 성산기(城山記)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더벅머리 시절부터 책상을 지고 오르내린 것이 일년에 두세 번이었다. 이 산을 사랑한 것이 미녀 서시(西施) 이상이었다. 오래 이별하면 늘 꿈 속에 들어오고, 와서 찾게 되면 늘 그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이 붙어 정말 잠시도 떨어질 수 없었다. 푸른 절벽에 초가를 지어 허망한 반평생을 보낼 곳으로 삼고자 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과거시험에 빠져 오래 몸을 빼내지 못했다.”

시를 통해서도 청성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성산을 사랑함이 가인을 사랑함과 같구나(愛城山似愛佳人)/ 참모습과 깊은 정이 비 그치자 새롭도다(眞態濃情雨後新)/ 헤어져 십리길 와서 하룻밤 지났는데(十里別來經一夜)/ 두어 봉우리 푸르게 꿈에 자꾸 나타나네(數峯靑繞夢魂頻).

송암은 모친상을 마친 1566년 관물당을 떠나 아예 청성산으로 들어가 살고자 했다. 그래서 낙동강변 청성산 기슭에 연어헌(鳶魚軒)을 지었다. 연어는 시경에 나오는 ‘연비어약(鳶飛魚躍·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뜀)’에서 따온 말로, ‘만물이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그는 1573년에는 또 청성산에 청성정사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며 유유자적하다 세상을 하직한다. 죽은 후에는 청성산에 묻혔고, 그리고 후일 묘 아래 건립된 청성서원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다.

송암의 벗인 학봉 김성일이 송암 영전에 올린 제문 중 일부다.

‘나의 벗 청성산의 혼령이여/ 빈 배 같은 신세였고/ 늙은 학 같은 신세였지/ 바람과 달 같은 마음이었고/ 강호에서 살아야 할 성품이었지/ 그 지조는 옥과 같이 곧고 곧았고/ 그 모습은 난과 같이 아름다웠지/…그 무엇이 그대를 즐겁게 했나/ 사방 벽에 놓여있는 책들이었지/ 어디에다 그대 흥취 붙였나/ 시 읊고 술 마시는 두 가지였지.’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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