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희림, 그녀가 월항쟁·월문학에 빠진 이유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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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11   |  발행일 2013-10-11 제37면   |  수정 2013-10-11
“광주가 5월이라면 대구는 10월이다, 그런데 왜 10월은 사건인가”
시인 고희림, 그녀가 월항쟁·월문학에 빠진 이유
고희림 10월문학제위원장은 “광주 5월의 뿌리가 바로 대구 10월”이라고 했다.

“一色으로 짠 커다란 역사의 관을 메고/ 가창골은 배가 퉁퉁 불러갔다./ 무례의 긴 도시를 옹호하며/ 어정대던 정치아저씨 양주술 오르고/ 배불리 주워먹던 새들은 여러번 똥을 쌌다./ 이제, 하늘의 절벽에서나마/ 이 괴물처럼 부푼 배를 찌르고/ 순백하고 순백하기 짝이 없고/ 거대하고 거대하기 짝이 없던 무덤이고자 한다.” -고희림(인간의 문제, 끝나지 않는 시월 중)

프랑스를 위기에서 건진, 백마를 탄 ‘잔다르크’. 고희림(53)을 아는 사람은 그녀를 ‘고다르크’라 부른다. 하지만 그녀는 ‘소서노’로 불리길 원할지도 모른다. 고희림은 눈물이 많은 시인이다. 감성이 그만큼 풍부해서일 거다. 그녀는 거칠고 직설적이다. 도무지 사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머무르고 있다. 특히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과 배려심이 깊다. 고희림은 지난 3월 제1회 10월문학제 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문학제를 이끌었다. 평범한 주부로 살다 정치·사회문제에 천착한 이유가 뭘까. 지난 4일 팔공산 자락에서 그녀를 만나 대구10월과 대구정신에 관해 물어봤다.


-최근 ‘인간의 문제, 끝나지 않은 시월’이란 시집을 냈다. 어떤 내용인가.

“2009년부터 10월항쟁유족을 일일이 찾아 구술을 녹취했다. 그 자료를 모아 시와 산문으로 엮어냈다. 유족의 구술이 곧 시(詩)이자 역사였다. 많은 이들이 왜 억울하게 죽어갔는지 알아가는 과정 속에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의 문제’가 먼저라는 걸 깨달았다.”

-유족과의 만남을 통해 느낀 건 무엇인가.

“태어날 때부터 ‘빨갱이가족’이라고 낙인찍혀 한평생을 산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다. 분단의 아픔과 유족의 아픔은 남의 일이 아니다. 손을 잡고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어떤 활동이 필요한지,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을 했다.”

-어떤 계기로 대구10월에 천착하게 됐나.

“2010년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다니던 중 시적 주제를 찾다 대구10월을 마주하게 됐다.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들더라.”

-대구10월은 어떤 의미가 있나.

“광주가 5월이라면 대구는 10월이다. 광주의 5월은 ‘민주화운동’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대구의 10월은 2010년에서야 ‘사건’으로 정리됐다. 광복 후 일제가 물러간 뒤 우리는 미국을 반겼지만 원하던 해방군이 아니었다. 배가 고파 쌀을 달라는 생존권 차원에서 시작된 항쟁이었다.”

-전쟁이란 야만적 상황에서 학살이 불가피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학살은 학살이다.”

-대구작가회의가 10월문학제를 앞두고 시첩을 발간했다. 참여 작가는 누구이며, 발간계기는 무엇인가.

“2010년 10월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는 이들을 만났다. 문학으로 먼저 10월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대구작가회의가 ‘휴머니즘을 옹호하는 강렬한 현실주의 문학의 거점’을 표어로 내걸고 있듯이 작가회의 작가들이 주로 참여했다. 이하석, 정지창, 김용락, 정대호, 김윤현, 이대우 등이다.”

-10월문학제가 끝났다. 자평을 한다면.

“4월부터 강연과 토론, 답사 등 5회에 걸쳐 준비를 꼼꼼하게 했다. 대구에서 처음 10월항쟁을 주제로, 문학인은 물론 미술·음악·무용·사진을 하는 다양한 예술가와 함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대구에 살면서 10월항쟁도 모른 자신이 부끄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시는 언제부터 썼나. 처음부터 참여시를 썼나.

“80년대 대학(숙명여대 정외과)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졸업 후 고시공부도 잠깐 했다. 대구에서 3년간 중학교에서 사회교사를 하다 결혼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80년대 말부터 10년간 습작기간을 거쳐 99년 ‘작가세계’에 등단했다. 95년 교육시민운동을 시작하고 창비나 실천문학을 보면서 무엇을 쓸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책만 읽고 틀어박혀 뭘 모르고 상상력으로만 시를 쓰는 건 ‘죽은 시’란 걸 깨달았다.”

-시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어떤 시인이 되길 원하는가.

“글은 이 세상과 맞짱을 떠야 결이 굳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오는 시대상황을 시어로써 증언하는 증언자다.”

-시집은 언제 냈나.

“2003년 ‘평화의 속도’란 첫 시집을 냈다. 사실 많이 썼지만 출간은 하지 않고 있다.”

-반응은 어땠나.

“‘나 고은이야’하면서 고은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서 시를 썼니. 내가 네 시를 받고 다른 사람한테 마구마구 이야기해 줄거야’란 격려를 받았다. 리영희 선생은 ‘일면식도 없는 고 시인의 시집을 잘 읽었다. 곁에 두고 보겠다’는 친필엽서를 보냈다. 김남조 시인(숙명여대 교수)은 ‘너 숙대 다녔는데 왜 몰랐지’하며 ‘내가 시집 받고 전화한 건 너랑 최은미 밖에 없는데’하면서 1시간가량 통화를 했다.”

-서정시는 쓰지 않나.

“써야지.(웃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구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곳이다. 서울의 식민지가 아닌가.”

-평범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을텐데.

“하하하(웃음), 의흥에서 고부잣집이라면 알아줬다. 집안이 꽤나 부유했다. 하지만 나 혼자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자기만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건 가치가 없다. 문학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시와반시’ 발행인을 역임하기도 했다. 문학을 하는 태도랄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문학 하는 사람은 편을 가르면 안 된다. 지역에 살면서 중앙에 기웃거리지 말고 지역을 지켜야 한다. 또 ‘내가 시인입네’ 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내가 내다’ 하면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다. 강가에 왔으면 물에 들어가야 하지 않나.”

-정치활동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제대로 된 시를 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체인지대구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구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대구가 변화하기를 열망하지만 정작 대구에 대해 연구한 사례가 별로 없다. 정치는 남의 영역이 아니다. 또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도 어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바라고 희망하는 사회를 이룩하려면 참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인가.

“항심(恒心)이 있되 늘 성찰하는 사람, 일상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 권력과 자본에 집착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름답다.”

-앞으로 대구10월과 관련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대구10월이 보통명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가창댐 인근에 위령비를 건립하고, 역사관과 평화공원을 조성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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