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10월항쟁유가족회(나정태·채영희·이성번씨·왼쪽부터) 회원이 10월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 독립운동가 집안의 채영희씨
“10월만 되면 먹먹합니다. 10월 마지막 날에는 술 한잔하지요. 5월이 광주를 상징한다면 대구는 바로 10월입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란 노래처럼 10월을 ‘사랑의 달’또는 ‘수확의 달’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채영희씨(10월항쟁유가족회 회장)는 매우 낯선 인물이다.
그녀는 대구시 동구 미대동 출신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1892~1980)의 손녀다. 미대동 인천채씨 문중은 3·1운동 당시 대구유림 중 마을 단위로는 유일하게 만세운동에 참여한 곳이다. 채충식 선생은 천석꾼의 후손으로 장진홍 열사와 시인 이상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 등과 교류했으며, 독립운동과 관련해 숱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회의협상차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자 채영희씨의 아버지인 채병기씨는 46년 대구10월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 그는 6·25전쟁 때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좌파정치범으로 분류된 뒤 그해 7월30일 가창골(현 가창댐)에서 처형됐다.
채충식 선생은 자신의 사상과 신념에 영향을 받은 아들을 먼저 보냈다. 그는 저서 ‘잡록’에 손자와 손녀들이 살아갈 지혜와 교훈을 적어 놨다. 해방둥이인 채영희씨는 ‘빨갱이의 딸’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다.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채씨는 어머니와 함께 간난고초를 겪었다.
채씨는 “무관심이나 외면으로 잘못된 역사를 방관하면 이 또한 역사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라며 “반드시 10월항쟁의 참뜻이 밝혀지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영남일보 기자였다” 이성번씨
“지금은 10월이 오면 오히려 행복합니다. 주변에 저와 가족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고마운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성번씨(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대변인)는 영남대 생물학과(81학번)를 나왔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빨갱이였다는 이유로 교원임용에서 탈락하는 등 남모를 아픔을 갖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 이병옥은 대구교남학교를 졸업한 부잣집 도련님이자 집안의 기대주였다. 영남일보 기자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10월항쟁 당시 운수노조위원장으로 참여한 뒤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돼 6·25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34세에 가창골에서 학살됐다.
이병옥의 아들 이복녕은 4·19이후 대구의 유족이 중심이 된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조직, 6·25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희생자의 시신을 찾는 등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신원운동을 했다. 하지만 군부정권 아래서 수차례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다 2007년 사망했다.
이성번씨는 “6·25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학살의 뿌리는 바로 대구의 10월정신”이라며 “10월항쟁을 민주주의 운동, 생존권운동, 애국운동으로 복원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 식구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 겪은 나정태씨
“아버지는 철도국 직원이었는데 집안의 기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10월항쟁 때 참여했습니다. 6·25전쟁 중 제가 네 살 때 아버지가 가창골에서 학살되고 난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지요. 일곱 살 때 어머니는 재가하고 저는 큰아버지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초등학교만 졸업했습니다. 여동생과는 헤어져 살다 83년 이산가족찾기에서 만났습니다.”
나정태씨는 어릴 적 ‘빨갱이의 자식’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학살당한 사실을 모르고 중양절에 제사를 지내다 2011년 진화위에서 아버지 나윤상이 7월30일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현재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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