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4]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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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02   |  발행일 2013-10-02 제20면   |  수정 2013-10-02
임금이 승하하자 벼슬을 초개처럼 던지고…고고한 절의와 청절한 인품은 길이 전해져…
하서 김인후의 절개, 우암 송시열이 힘차고 장중한 글씨로 웅변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4]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의 누각인 확연루.

장성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은 하서(河西) 김인후(1510~60)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이다. 하서는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1796년)된 인물이다. 이 필암서원은 경상도의 서원들이 대부분 산비탈에 건립된 것과는 달리 야산 아래 평지에 세워져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 유림이 하서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황룡면 기산리에 사당을 창건해 위패를 모시면서 시작됐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24년에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고암(鼓巖) 양자징(1532~94)을 추가 배향(配享)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필암’이라 이름 지은 것은 하서의 고향(황룡면 맥동)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서원은 강학공간인 강당이 사당을 향해 북향하고 있는 구조라는 점이 특이하다. 건물 남쪽 면은 벽을 설치하고 창문을 내었으나, 북쪽 면은 기둥 사이에 벽을 설치하지 않고 비워 놓은 것이다. 서원 문인 누각도 유사한 구조다. 이 역시 경상도의 서원과 다른 점이다. 이곳에서는 양송체(兩宋體)의 주인공인 송시열·송준길의 글씨 편액, 그리고 정조 임금의 글씨 편액을 만날 수 있다.


◆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표현한 ‘확연루’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4]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확연루’ 편액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 작명도 그가 했다.

필암서원 앞에 서면 누각에 걸린,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의 ‘확연루(廓然樓)’ 편액이 눈길을 끈다. 힘차고 장중한 글씨이면서, 이름 또한 누각 명칭으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편액은 우암(尤庵) 송시열(1607~89)의 글씨다.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우암은 보수적 정통 성리학자로 북벌론의 중심인물이었다.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우암의 기질이 드러나는 글씨라 하겠다.

확연루의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온 말로, 거리낌 없이 넓게 탁 트여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확연루라고 누각 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확연루기’에 의하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이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를 택했다고 한다.

확연루를 통과해 들어가면 강당 건물이 가로막는데, 옆을 돌아 강당 마루에 올라서면 마루 위에 걸린 작은 편액 ‘청절당(淸節堂)’이 눈에 들어온다. 이 강당 건물은 옛 진원현(珍原縣)의 객사건물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청절당이란 이름은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고, 편액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72)이 썼다. 이 역시 하서의 인품을 대변한다.

우암과 함께 기호학맥을 이은 동춘당 역시 글씨를 잘 썼으며, 우암과 함께 웅건한 글씨체로 널리 알려진 양송체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강당 앞 동·서재의 ‘진덕재(進德齋)’와 ‘숭의재(崇義齋)’ 편액도 그가 썼다.

강당 건물 처마에 달린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屛溪) 윤봉구(1681~1767)의 글씨다. 사액 편액이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다. 병계는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1641~1721) 문하에서 수학, 우암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 학자다. 강당 맞은편에 있는 사당 ‘우동사(祐東祠)’에는 하서와 고암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편액 글씨는 주자(朱子)의 글씨에서 집자·집획(集字·集劃)한 것이라고 한다.


◆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 보관하는 ‘경장각’ 편액은 정조 글씨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4]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인종이 세자 시절 하서 김인후에게 그려 준 묵죽도(복사본).

필암서원이 기리는 하서는 고고한 절의와 깨끗한 인품을 지닌 도학자였다. 18세 때 벌써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 항아리(秋水氷壺) 같다’라는 칭찬을 들었던 하서는 31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34세에는 후일 인종이 되는 세자의 학문을 담당하는 시강(侍講)이 되었다. 이때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덕행에 감동해 손수 묵죽도 한 폭 그려 하사했다.

36세 되던 해 인종이 즉위하자 하서는 큰 기대를 했으나 같은 해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했다. 이에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학문을 닦으면서 평생을 보냈다. 명종 즉위 후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향리에서 일재(一齋) 이항(1499~1576), 고봉(高峯) 기대승(1527~72)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송강(松江) 정철, 고암 양자징 등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시작(詩作)에도 각별한 소질을 드러냈던 그는 1천600여 수의 시도 남겼는데,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 늙기도 절로 하여라’는 시조는 그 대표작이다.

필암서원 사당 앞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이 하나 있다. 경장각(敬藏閣)이다. 이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1543년) 하서에게 ‘주자대전’ 한 질과 함께 손수 그려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이 묵죽도는 훗날 하서의 높은 절의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바위 주위에 솟아 있는 대나무를 그린 이 그림에는 인종이 하서에게 그림에 맞게 쓰라고 해서 쓰게 된 화제도 있다. 보기 드문 군신 합작품이다.

‘뿌리와 가지, 마디, 잎이 모두 정미하고/ 돌은 벗인 양 주위에 둘러 있네/ 이제야 알겠다 성스러운 솜씨의 조화를/ 하늘과 땅 훈훈한 기운 속에 잘도 자라난다.’

경장각 편액 글씨는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이다. ‘경장각’은 ‘왕가 조상의 유묵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서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한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배향하고자 할 때, 급히 장성으로 파발을 보내 선왕이었던 인종께서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내탕금을 내려 경장각을 세운 뒤 하서 종가에서 귀중히 간직해 온 묵죽도를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했다. 그리고 편액 글씨를 친히 써서 내렸던 것이다.

경장각 편액은 왕의 친필이어서 벌레·조류 등을 막기 위해 망을 쳐두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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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의 합작 ‘양송체’는

양송체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두 사람의 글씨체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었으므로 율곡을 사숙한 석봉 한호의 글씨체를 썼지만, 석봉체의 골격을 가지면서도 웅건장중(雄健壯重)한 무게와 기품을 더해 별도의 품격을 가진 서체를 만들었다.

양송체의 등장에는 배경이 있다. 석봉은 성리학자라기보다는 서예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가 조선의 국서체가 된 것에 대해 사림(士林)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대학자 두 명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자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우암에게 글을 받고(撰), 동춘당에게 글씨를 받아(書) 비석 등을 세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동춘당의 글씨가 송설체와 석봉체를 바탕으로 안진경체의 비후미(肥厚味)를 더해 유려하고 활기차다면, 우암은 안진경체를 더 깊이 받아들여 안진경체의 웅건장중미가 더욱 돋보였다. 이에 따라 양송체는 근엄장중(謹嚴壯重)하고 원만웅건(圓滿雄健)한 특징을 띠게 되었다. 또한 이때의 안진경체 수용은 조선 후기 안진경체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을 추종하는 많은 유림이 그 서체를 배워 쓰게 되는데, 이의현(1669~1745)의 함안 ‘조려신도비(趙旅神道碑)’(1726), 이간(1677~1727)의 부여 ‘의열사비(義烈祀碑)’(1723), 이양신(1689~1739)의 정읍 ‘송시열수명유허비(宋時烈受命遺墟碑)’(1731), 민우수(1694~1756)의 순창 ‘삼인대비(三印臺碑)’(1744), 홍계희(1703~1771)의 완주 ‘안심사사적비(安心寺事蹟碑)’(1759)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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