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3]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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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18   |  발행일 2013-09-18 제22면   |  수정 2013-09-18
“선비는 무릇 敬과 義를 목숨보다 귀히 여길지어다”
조선 ‘선비정신의 아이콘’ 남명의 혼이 어린 곳
백성과 왕을 위해 불의와 타협않은 ‘대쪽 일생’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3]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남명 조식을 기려 지은 덕천서원의 강당인 경의당 전경. ‘경의당’이란 명칭은 남명의 핵심 가르침인 ‘경의(敬義)’정신을 본받고자 정한 것이다.

‘배는 물 덕분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 때문에 전복되기도 한다. 백성은 물과 같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남명(南冥) 조식(1501~72)이 지은 글 ‘민암부(民巖賦)’ 중 일부다. 배가 순항하고 조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하듯이, 군왕은 민심을 잘 알고 백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산림에 묻혀 살면서도 백성의 삶과 왕을 위해 왕실과 조정을 거침없이 비판한 남명은 ‘태산교악(泰山喬嶽)’ ‘추상열일(秋霜烈日)’의 기상으로 살았다.

‘선비는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 제후의 벗이 되지 아니한다’고 했던 그는 진정한 선비정신을 일깨우고 심어주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조선조 선비들은 기묘·을사사화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아예 세상사를 외면하는 은둔자로 살거나, 불의를 당해도 수수방관하는 나약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시절 남명은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도 사회를 맑게 하고 기운을 바로잡는 중대한 직분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실천해 보임으로써 선비정신을 정립한 인물이다. 유학자가 재야의 비판세력으로 자리잡아, 벼슬하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전하는 것을 벼슬생활하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선비정신을 확립한 남명의 학행과 사상의 중심이 경(敬)과 의(義)다. 덕천서원 강당 명칭인 ‘경의당(敬義堂)’은 조식의 이 같은 가르침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3]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남명 조식의 친필 한시



◆‘조선 최고 선비’ 남명 조식의 핵심 가르침 ‘경의’

남명은 평생 동안 산림처사로 있으면서 경의지학(敬義之學)을 바탕으로, 진정한 선비정신을 철저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경(敬)’은 성인이 되는 수양 방법으로,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삼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義)’는 올바른 것을 실천하며 옳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사상의 특징인 ‘경의’사상은 조선 성리학의 실천적 학풍 전통을 계승, 위기지학(爲己之學:인격수양 학문)의 바탕인 경과 함께 경을 외부로 실천하는 행위인 의를 아울러 강조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남명은 자신이 항상 휴대하던 패검에 ‘경은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고(內明者敬), 의는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外斷者義)’이라고 새겼다. ‘경의검(敬義劍)’이라 불린 패검이다. 그리고 거처하는 방 벽에 특별히 ‘경의’를 크게 써 놓고 항상 경계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가(吾家)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으니, 만고에 뻗치도록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성현의 천만 마디 이야기의 귀결점은 모두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서책을 의지해 의리를 강론하여도 실제로 체득함이 없는 것은 결국 소용이 없으니 학자는 말을 잘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며 언제나 실천을 촉구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문하생에게 각별히 “경의, 이 두 글자는 학자에게 지극히 중요하다. 오로지 공부가 원숙해야 하나니, 원숙해지면 한 점의 티끌도 마음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며 경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경에 근본을 둔 정신수양과 의에 바탕을 둔 투철한 실천정신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그 정신을 이은 제자들은 그것을 임진왜란 때 발휘해 국난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남명의 가르침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성호 이익은 ‘대체로 우도(경남) 사람들은 선량하면서도 정의로운데 이는 남명의 기풍을 본받아서다’라고 평했다.

남명을 기리기 위해 1576년 후학들이 창건한 덕천서원(1609년 사액)의 강당 이름은 이런 남명의 핵심 가르침을 본받자는 의미로 ‘경의당’으로 정했다. 동재와 서재의 이름을 한때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로 부르기도 했는데, 남명의 후학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엿볼 수 있다.

‘경의당 ’편액은 약헌(約軒) 하용제(1854~1919)의 글씨다. 산청(단성면) 남사마을 출신인 약헌은 무과 급제 후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면우 곽종석의 가르침을 받으며 유학에 천착한 인물로, 1919년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했다가 투옥된 뒤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했다. 이 글씨는 약헌이 별세한 해인 1919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덕천서원 출입문에 걸린 ‘시정문(時靜門)’ 편액도 그의 글씨로 추정된다.

강당 건물 처마에 걸린 ‘덕천서원(德川書院)’ 편액은 모정(慕亭) 배대유(1563~1632)의 글씨라고 한다. 학자이자 문신인 모정은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초서·예서에 뛰어났다. 한훤당 김굉필을 기리는 ‘도동서원’ 사액현판이 그의 글씨이고, 내암(來庵) 정인홍(1535~1623)이 지은 남명 신도비명 글씨도 모정이 썼다. 모정은 내암의 제자이고, 내암은 남명의 수제자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3]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경의당' 마루 위에 걸린 '경의당' 편액. 약헌 하용제의 글씨다.


◆임종 때 자신을 ‘처사’로 불러달라고 한 남명

남명은 합천(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따라가 부친에게 글을 배웠다. 20세(1520)에 생원·진사 초시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개혁의 기수 정암 조광조가 죽고 숙부 조언경마저 멸문의 화를 당하자 벼슬의 길을 단념하게 되었다. 남명은 25세 때 산사에서 벗들과 성리대전을 읽다가 송나라 말기 학자 노재(魯齋) 허형이 말한 ‘이윤(伊尹)이 뜻한 바를 뜻으로 삼고 안연(顔淵)이 배운 바를 배워서, 벼슬을 하면 크고 유익한 일을 하고 초야에 있으면 지조를 지켜야 한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속세에 묻혀서 지키는 것도 없다면 뜻한 바와 배운 것을 무엇에 쓰겠는가”라는 대목을 접하고, 이전의 학문이 옳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성현의 학문에 전념했다.

항상 ‘성성자(惺惺子)’라 이름 지은 쇠방울을 차고 다니고, 성현들의 초상을 그려 수시로 마주하며, 경의검을 휴대했다. 그리고 허리띠에는 ‘혀는 새는 것이요, 가죽은 묵는 것이다. 살아있는 용을 묵어 깊은 곳에 감춰두라’라는 글을 새겨 차고 다니면서 성현들의 가르침을 잠시도 잊지 않고 실천하려 최선을 다했다.

김해 산해정과 합천 뇌룡정 시절을 거쳐 61세(1561)가 되자 남명은 일생의 마지막 도장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사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자신의 학문과 정신, 사상을 후학들에게 전했다. 남명이 이때 지은 시 ‘덕산에 살 곳을 잡고서’라는 시다.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을까마는/ 다만 천왕봉이 하늘과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 맨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은빛 물줄기 10리나 뻗었으니 도리어 마시고도 남음이 있다네’

1572년 산천재에서 운명한 남명은 운명 전 문병 온 김우옹, 정구, 하항, 노옥계에게 사후의 칭호를 ‘처사(處士)’로 할 것과 자신의 학문은 ‘경의’ 두 글자에 집약되는데 이는 하늘의 일월처럼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따를 것을 당부했다. 산천재에 걸린 전서 ‘산천재’ 편액은 송하(松下) 조윤형(1725~99) 글씨라고 한다.



■ 왕실과 조정에 경종 울린 남명의 상소문 ‘단성소’

남명이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사직하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인 을미사직소, 소위 ‘단성소(丹城疏)’는 당시 정치제도나 군신관계로 볼 때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극언들이 포함돼 있다. 이 단성소는 명종 임금과 대비(大妃)를 진노하게 하고 조정의 중신들을 놀라게 함은 물론, 온 지식인들도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신 조식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 60에 가까웠으나 학문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兵科)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쇄소(灑掃)의 일도 맡기에 부족합니다. …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해 지탱해 나갈 수 없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은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산만 불리는데도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은 자기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로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소서.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은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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