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서 수양대군役 열연한 이정재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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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16   |  발행일 2013-09-16 제23면   |  수정 2013-09-16
“이렇게 매력적인 악역 보셨나요?”
수양대군役 감춰진 멋 알고
“이건 꼭 해야할 영화” 결심
주연만 하다 조연 맡아보니
진짜 연기자 되어가는 기분
“난 여전히 연기가 고프다”
영화 ‘관상’서 수양대군役 열연한 이정재

 이정재에게 ‘관상’은 흥미로운 지점에 있는 영화다.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도시적 이미지를 상징하던 그가 오랜만에 사극에 출연한다는 점이 그렇고, 당연시되던 주연의 포지션에서 멀어진 점도 그렇다. 평소 좋아했던 한재림 감독으로부터의 러브콜에 희색이 만면했던 그도 처음 시나리오를 마주한 후 ‘이건 뭐지?’라는 황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는 80점 이상은 받을 좋은 영화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30점으로 확 깎였다. 아무리 읽어도 내 역할(수양대군)이 나오지 않는 거다. 절반 정도를 읽으니까 그제서야 나오더라. 5분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읽었다.”(웃음)


 ‘관상’은 얼굴을 통해 앞날을 내다보는 천부적인 능력을 지닌 관상가 내경(송강호)이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는 역사(계유정난) 속에 휘말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따라서 영화는 사건의 주역인 수양대군이나 김종서(백윤식)가 아닌, 내경을 중심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를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하지만 이정재는 알고 있다. 영화적 캐릭터로서 수양대군의 감춰진 매력을 말이다. “후반부터 수양대군이 영화의 색깔과 감정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데 전율이 느껴졌다. ‘이건 꼭 해야 하는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어난 수양대군은 이정재와 꽤 멋지고 강렬한 만남을 이뤘다. 해외영화 전문지인 트위치 필름에선 ‘이정재가 맡은 역할 중 최고다’라는 찬사까지 보냈을 정도다. 사실 이렇게 잘 생기고 젠틀한 악역이 또 있을까 싶긴 하다. 수양대군의 얼굴에 난 선명한 칼자국마저 자기 영역을 깨뜨리거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과감한 이정재의 또 다른 연기열정에 대한 의지로 읽힐 정도니 말이다. “콤플렉스와 욕망의 접합체인 수양대군을 이정재가 가진 세련된 고급스러움과 여유로운 모습에 접목시켜보고 싶었다”는 한재림 감독의 말처럼 그는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수양대군으로 돌아왔다.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정재를 만났다.

-‘관상’도 그렇고 최근 출연작들이 조연에 가깝지만 유독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 고르는 안목이 남다른 것 같다.

“운이 좋은 거다. 작품 고르는 안목이 특별히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언을 해주는 분이 계신 것도 아니다. 물론 연륜이 쌓이다보니 작품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다. ‘관상’은 감독이 좋고 배우가 좋고 캐릭터가 좋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관상’은 영진위 시나리오 대상작이다. 한재림 감독이 이를 많이 각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의 80% 이상을 각색했다고 들었다. 관상가가 중심이 돼 계유정난이 포함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펼쳐 간다는 큰 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싹 바뀌었다. 김혜수씨와 조정석씨가 각각 연기한 연홍과 팽헌 역도 새롭게 만들어진 거다. 원작은 굉장히 어두웠다고 하더라.”



-극 중 수양대군이 재해석됐다는 평가가 많다.

“재해석이라는 표현보다는 수양대군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수양대군이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역사속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비극을 겪게 된 관상가의 이야기다. 때문에 초점은 그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그가 아픔을 느끼게끔 하는 인물이다. 기존의 수양대군의 모습과 달리 악역으로 비치면 좋을 것 같았다. 감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관객들은 그 부분을 굉장히 신선하게 느낄 것 같다. 이정재가 연기한 악역이라는 점에선 특히나.

“솔직히 나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웃음). 악역인데 ‘뭔가 했다’라는 소리는 들어야 하니까. 그동안 내가 해보지 않은 연기가 뭘까 생각해보니 감정을 분출하는 연기였다. 그런 점에서 수양대군은 비중에 상관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캐릭터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왕을 본 적 있나. 건들건들한 기질에 사냥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설정이 하나둘 모여서 지금의 인물로 만들어졌다. 과거 이런 캐릭터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되게 (연기가) 재밌었다.”



-사실 모피를 입고 등장한 첫 장면부터 대단한 포스가 느껴졌다. 캐릭터 형성과정에 당신의 의중이 들어간 것이 있다면.

“왕의 숙부인 대군의 위치지만 행동은 마치 시정잡배의 우두머리처럼 터프하게 칼을 어깨 위에 탁 올려놓는다든가, 사람을 볼 때도 은근히 깔보듯 하는 행동과 모습을 하고 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수양은 딱 이럴 거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확신이 들면 그렇게 해야 연기가 편하고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번 역할을 위해서 따로 준비한 게 있나.

“발성과 말 타는 연습을 중점적으로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판단의 기준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나름대로 관련 서적과 자료를 보면서 공부를 했다. 그냥 단순한 악당으로만 비치는 건 싫었다. 행동 하나에서도 복잡한 내면을 표출해 내야 했다. 어떨 때는 은유적으로, 또 어떨 때는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근간을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최근 출연작 대부분이 멀티캐스팅 영화다. 많은 배우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당신만의 전략이 있다면.

“난 상대배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유심히 잘 듣는 편이다. 어떤 컬러톤으로 어떤 연기를 할지 그가 캐릭터 설정을 빨리 잡을 수 있도록 나는 최대한 늦게 내 캐릭터를 만든다. 그래야만 그와 더 잘 어울리는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그게 팀워크다. 내가 어떤 색깔을 내야 그와 앙상블이 잘 맞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접근한다. 그러면 다른 배우들과 색깔이 겹치지 않는다.”



-주연에서 밀려났다는 생각도 들 텐데.

“‘신세계’는 그래도 주연이었다.(웃음) 주연과 조연을 넘나드는 게 사실은 훨씬 더 자유롭다. 일을 하는 데 있어 흥미롭고 좋은 캐릭터를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재밌는 캐릭터는 조연에 정말 많다. 요즘 연기하는 재미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요즘은 진짜 연기자라는 느낌이 든다.

“그게 다 역할 때문인 것 같다. 작가들이 조연들 역할을 더 잘 써준다. 왜냐하면 주연을 잘 받쳐줘야 하고, 극의 흐름을 바꿔야 할 때도 조연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역할을 잘 해내면 칭찬을 더 많이 듣게 된다. 눈에 확실하게 띈다. 반면 주연은 잘해야 본전이다. 더욱이 빛나는 조연들이 포진해 있으면 상대적으로 주연이 묻혀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다 해보니까 알겠더라.”



-데뷔 20년 차다. 그 사이 많은 변화를 느꼈을 듯하다.

“개런티는 많이 오르지 않았다.(웃음) 우선 변화라면 한국영화가 요즘 관객의 사랑을 많이 받고, 영화 편수도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전문적인 기술력도 높아져서 연기자는 연기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좋은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풍요롭기까지 하다. 게다가 지금은 감독이 워낙 꼼꼼히 준비하고 열심히 하니까. 진짜 연기자가 편해졌다. ”



-배우로서 목표가 있다면.

“꾸준히 오래하는 게 목표다.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시나리오가 재미있으면 무조건 할 생각이다. 나는 여전히 연기가 고프다.”(웃음)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영화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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