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2] 대구 달성 ‘삼가헌’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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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04   |  발행일 2013-09-04 제20면   |  수정 2013-09-04
목숨과 바꾼 절개…박팽년의 선비 魂 살아 숨쉬는 듯
박팽년 후손 代이어 살아온 고택
선비의 세가지 덕목 편액에 담아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2]  대구 달성 ‘삼가헌’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 후손들이 살아온 고택 ‘삼가헌’의 사랑채 건물. 이 건물 마루에 걸린 ‘삼가헌(三可軒)’ 편액(작은 사진)은 당대 명필 창암 이삼만의 글씨다. ‘삼가헌’은 그것을 창건한 박성수의 호이기도 하다. 이 건물 옆에는 연못이 딸린 별당 하엽정(荷葉亭)이 있다.

고택이나 옛 정자 중 유달리 당대 명필들의 현판이 많은 곳이 있다. 그런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히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의 서예가 필적이 있는 경우 그 사연이 궁금해진다. 건물 주인공의 학덕이 우뚝하게 높아 당대의 많은 선비가 존경했거나, 학덕이 크게 높지 않더라도 성품이 사람을 좋아하고 서화를 좋아하는 데다 경제력이 있어 서예가나 예술가 등을 초청해 즐기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글씨를 남긴 인물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당대의 명필로 통한, 추사도 인정한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의 휘호 편액이 대구 달성의 순천박씨 집성촌 고택, 즉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1417~56) 후손 고택인 ‘삼가헌(三可軒)’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연유가 궁금했다. 창암은 정읍과 전주에서 활동했던 서예가이고, 그의 글씨 편액을 대구·경북지역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다.

대구 낙동강 부근에 있는 삼가헌(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고택으로, 대구의 대표적 고택 중 하나다.

조선시대 세종과 문종 때의 집현전 학자로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맞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취금헌(醉琴軒) 박팽년. 그가 반역죄로 멸문지화를 당할 때 그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이씨도 관비가 되었는데, 당시 성주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법률에 따라 아들이 태어나면 죽임을 당하고, 딸이 태어나면 노비가 될 운명이었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꾸어 키움으로써 그 아이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박팽년의 핏줄도 이어질 수 있었다.

외조부에 의해 ‘박비’라는 이름으로 양육돼, 성종 때 사육신에 대한 면죄가 이뤄지고 박비도 그 과정에서 자수해 사면을 받게 되었다. 사면을 받은 박비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달성군 하빈면 묘골(묘리)에 정착, 대를 이어 살아가게 되었다. 이후 박비는 박일산으로 이름을 고치고, 할아버지 박팽년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 것이 오늘날 육신사(六臣祠)의 발단이다.

이 묘골에 살던,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삼가헌 박성수(1735~1810)가 1769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인 ‘삼가헌’을 당호로 삼았다. 그후 박성수의 아들 박광석이 1809년 초가를 헐고 안채를 지었고, 1826년 사랑채를 지었다.

지금도 삼가헌의 사랑채 건물 마루 위에 편안하면서도 기품 있는 글씨의 ‘삼가헌(三可軒)’ 편액이 걸려있다. 창암 이삼만의 글씨인 이 편액이 건물의 품격을 훨씬 더 높여주고 있다.

창암의 글씨 편액이 이곳에 걸린 연유가 무엇일까. 삼가헌 박성수가 서울에서 벼슬을 할 때 당시 명필로 알려진 창암의 글씨를 좋아해 지인을 통해 글씨를 청탁해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박성수가 삼가헌에 머물 때 많은 선비와 서예가들이 오갔을 것이고, 창암도 삼가헌에 한 번 들렀다가 휘호했을지도 모른다. 삼가헌에 살고 있는, 박팽년 후손 박도덕씨와 나눈 이야기다. 창암의 생몰 연대로 보아 박광석이 사랑채를 새로 지은 후 창암 글씨를 받아 편액을 달았을 지도 모르겠다.

‘삼가헌’이란 당호는 ‘중용(中庸)’의 다음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천하의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여기서 유래한 ‘삼가(三可)’는 선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知, 仁, 勇)을 뜻한다.

사랑채인 삼가헌(고택 전체를 삼가헌이라고도 함) 옆에 1874년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부설하고 그 앞에 연못을 만들어 ‘하엽정(荷葉亭)’이라 명명한 별당이 자리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2]  대구 달성 ‘삼가헌’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2]  대구 달성 ‘삼가헌’
창암 이삼만의 글씨 편액인 지리산 천은사의 ‘보제루(普濟樓)’와 ‘회승당(會僧堂)’.

편액 ‘삼가헌’ 글씨 쓴 창암 이삼만은

자수성가형 조선 대표명필…추사도 감탄

창암 이삼만은 생존 당시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1~1840)과 함께 19세기 조선의 대표적 명필로 손꼽혔다. 이들보다 두 세대쯤 전에는 원교 이광사(1705~77)가 최고 명필로 통했다. 원교의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이은 창암은 가난한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오로지 글씨에 뜻을 두고 수련을 거듭, 마침내 일가를 이룬 서예가다.

그는 벼루 세 개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먹을 갈아 하루에 1천자씩 쓰고, 베를 빨아 글씨 쓰기를 반복했다. 이런 혹독한 수련 끝에 필력을 얻고, 인생 후반에는 그 필력으로 생의 양식을 삼은 직업 서예가로 살았다. 그는 자신인 남긴 글에서 신라의 명필 김생과 조선 중기의 원교 이광사를 사숙했다고 밝히고 있다.

추사가 청나라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였다면, 창암은 혹독한 자기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풀어낸 국내파였다. 그는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창암체를 개발, 자신만의 필법을 구축했다. 50세에 ‘규환’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삼만’으로 바꾸었다 한다. ‘삼만(三晩)’은 집이 가난해 글공부를 늦게 하고, 벗을 사귀는 것이 늦어 사회진출이 늦었고,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다는, 인생에서 중요한 세가지가 늦었다는 의미다. 그의 글씨체는 ‘유수체(流水體)’로도 불린다.

1840년 가을, 55세인 추사가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면서 한벽루에서 창암과 만나게 된다. 창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추사가 정중히 예를 갖춰 하필(下筆)을 청하니 “붓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操筆三十年 不知字劃)”며 겸손하게 사양했다. 추사가 다시 간곡히 청하자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江碧鳥遊白/山靑花欲然/今春看又過/何日是歸年)’라는 시 구절을 일필휘지했다. 추사는 이를 보자 ‘과연 소문대로이십니다(名不虛傳)”이라며 감탄했다.

이 이야기와 달리 창암의 글씨를 얕보며 면박을 주었다는 설도 있고, 이때 만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을 마치고 서울로 가던 길에 전주에 들러 창암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 그래서 그 애석함을 달래며 ‘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완주군 구이면 창암 묘소 앞에 지금도 서 있다. 창암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정읍과 전주를 주 무대로 활동한 서예가였던 만큼, 그의 글씨 편액도 주로 전라도 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김봉규기자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2]  대구 달성 ‘삼가헌’

육신사 태고정의 ‘일시루’는 안평대군 글씨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박팽년의 자손들이 정착해 살아온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 뒤쪽 산기슭에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의 위패를 봉안해 기리는 사당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박팽년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다가, 나중에 박팽년의 현손(玄孫)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도 함께 모셔 기리게 되었다.

이 육신사 경내에 보물 554호인 태고정(太古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박팽년의 유복손(遺腹孫)인 박일산이 1479년에 창건한 건물이다. 창건 당시에는 99칸 종택에 딸린 별당 건물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돼 사당과 태고정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614년에 후손들이 중건했다.

태고정에는 ‘태고정’ 편액이 처마와 마루 안에 두 개가 걸려있다. 마루에 있는 것은 석봉 한호 글씨다. 처마에 걸린 것은 박팽년 후손 글씨다.

‘태고정’ 현판 옆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모든 것은 본시 하나다’ ‘옳은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편액에는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낙관 글씨가 있는데, 이는 안평대군(1418~53)의 아호다. 그래서 안평대군이 쓴 글씨라고 전하지만, 안평대군은 이 집이 건립되기 전인 1453년 계유정난으로 사사되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데, 생존 당시에 받았던 글씨인지 모르겠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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