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주귀족 저항 없었다면 달성으로 천도…대구의 지도 달라졌을 것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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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7-26   |  발행일 2013-07-26 제34면   |  수정 2013-07-26
(達城·현재 달성공원에 위치한 고대 토성)
대구의 고대 성곽 (분지·앞산·금호강 양안)
신라, 경주귀족 저항 없었다면 달성으로 천도…대구의 지도 달라졌을 것
대구시 동구 용암산에 있는 용암산성. 용암산성에는 동구청이 지은 팔각정(오른쪽 맨 위)이 있 다. 팔각정에서는 대구 전경 을 조망할 수 있다.(왼쪽) 산성 안에는 옥천이라는 샘 터(오른쪽 가운데)가 있으며 아직까지 맑은 샘물이 솟아 나고 있다.


대구에 성곽이 축성되기 시작한 때는 성읍국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는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달구벌소국을 형성했던 곳으로 현재의 달성공원이 성읍의 중심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달구성을 달구화현으로 지칭했다가 경덕왕 때 대구현으로 개명했다고 나와있다. 현의 관아는 달구벌의 치소(治所)였던 달성에 뒀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689년 경주에서 달성으로 천도계획을 세웠다. 대구가 분지 지형으로 주변 산성을 이용한 군사적인 방어가 쉽고 낙동강 수계와 연결돼 있어 수로교통이 편리했으며, 들이 넓고 비옥해 농업생산력이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서라벌귀족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통일왕국의 뿌리를 내리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신문왕은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경주에서 달성으로 천도가 이뤄졌다면 대구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성이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3세기 경 축성한 달성
원형 가장 잘 보존돼
87개 고분군은 사라져


동구의 봉무토성 경우
군사용 아닌 도피용…
인근 아파트 조망 가능


대구∼영천 길목 위치한
용암산성은 머리띠 형
임란 때 샘 아직도 솟아


파동 계곡과 나란히 선
용두산성엔 평지 없어…
팔거산성은 군사요충지


신라, 경주귀족 저항 없었다면 달성으로 천도…대구의 지도 달라졌을 것
대구시 중구 달성 서쪽 둘레길. 15~20분이면 달성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다.

◆달성

달성(達城)은 대구의 ‘어머니 성’이다. 대구시 중구 달성공원에 위치한 달성은 백제의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신라의 월성에 비해 고대 토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손꼽힌다. 달성은 대구분지 서쪽 해발 40~70m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 포곡식 성으로, 성 안은 약간의 기복이 있으나 넓은 평탄부로 이뤄졌다. 재질은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토석혼축성이다.

달성의 정문은 지금과 같은 성의 동쪽이다. 오각형 형태의 능선을 따라 바깥쪽에서 쉽게 올라오지 못하도록 높고 가파르게 성벽을 쌓았다. 성의 길이는 약 1.3㎞, 높이는 낮은 곳은 5m, 높은 곳은 12m 정도다. 지금은 복개된 달서천 지류가 정문 성벽 바로 아래를 감싸 흘러서 자연적인 해자역할을 했다.

축성시기는 원삼국시대 말기인 3세기경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취락이 형성돼 있었으며, 원삼국시대에 축성된 이후 조선시대 초까지 여러 차례 수축됐다. 달성 일대 비산동, 내당동, 평리동에는 87개의 고분군이 밀집했으나 도시가 확대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달성에는 신라 말~고려 초까지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 달성 서씨의 세거지가 됐다. 임진왜란 때 달성에 경상감영이 잠시 설치됐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일제는 1906년 달성에 황궁요배전을, 14년에는 신사를 설치하는 등 대구를 영구지배하기 위해 신성불가침의 장소로 만들었다. 하지만 광복 후 신사는 46년에, 요배전은 66년에 각각 철거됐다. 달성공원에 동물원이 들어선 건 70년이다. 달성에는 또 대구박물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대구시립박물관이 있었다. 최근 달성공원동물원 이전이 확정되면서 달성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박승규 영남문화재연구원장은 “달성을 복원하고 일본의 오사카 역사박물관이나 부산 복천동 박물관처럼 주변에 대구역사박물관을 건립해 달성과 대구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이를 통해 대구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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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동구 봉무동 이시아폴리스 내 한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본 봉무토성(빨간 점).

◆봉무토성

대구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봉무토성(鳳舞土城)은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77.8m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은 1985년 대구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다.

성의 둘레는 약 600m, 높이는 약 30m 정도로 규모가 작다. 형태는 말발굽과 유사한 포곡식이고, 토석혼축성이다. 성의 남쪽 사면은 금호강의 흐름으로 형성된 천연단애이며, 그 밑에 흐르는 하천을 해자로 이용했다. 성 동북쪽으로 5m 정도의 성벽을 쌓았으며, 나머지는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했다.

출토유물로 볼 때 축성 시기는 달성과 비슷한 3~4세기 원삼국시대이며 군사적인 목적보다 감시성(城)이거나 도피를 목적으로 한 성이라고 볼 수 있다. 성에서 남동쪽으로 0.5~1㎞ 정도 떨어진 곳에 봉무동고분군과 불로동고분군이 있다.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동 토성과도 대치돼 있다. 현재 이시아폴리스 내 포스코 더샵 아파트단지에서 보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토성 남쪽 입구에 조선시대 행정관청인 봉무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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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 공항교 부근에서 바라본 검단토성(빨간 점). 오른쪽 가운데 조선시대 정자인 압로정이 보인다.

◆검단토성

검단토성(檢丹土城)은 대구시 북구 검단동·복현동 일대에 있는 원삼국시대의 토성이다. 대구분지의 북쪽을 흐르는 금호강 기슭의 구릉에 위치하며, 성의 둘레는 약 1.3㎞, 높이는 70~90m 정도다. 동쪽으로 금호강과 맞닿아 자연적인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북쪽과 남쪽 구릉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지금까지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또 성 남쪽에 복현동고분군이 있다. 성의 형태는 포곡식이며 토석혼축성이다. 도로와 공단, 학교 때문에 서쪽에는 성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선사시대부터 하나의 취락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집단이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 동쪽 금호강 능선에 조선시대 정자였던 압로정이 있으며 금호강 건너 봉무토성과 대치하고 있다.

◆용암산성

대구시 동구 도동에 위치한 용암산성(龍岩山城)은 동구 불로동에서 도동을 지나 평광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도동측백수림을 거쳐 북쪽으로 약 300m쯤 가다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대구~포항 고속도로 교각 밑에서 산성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이 성은 대구~하양~영천으로 통하는 옛 길목으로 해발 380m의 용암산에 자리 잡고 있다. 용암산성은 현재 대구시기념물 제5호다. 성곽으로 향하는 남쪽 길은 경사가 가파르며 동·서쪽 역시 경사가 45도나 된다. 약 40분쯤 등반하면 산꼭대기에 평탄한 지형이 나온다.

축성 형태는 산 정상 8부능선에 머리띠를 두른 모습의 테뫼식 산성으로, 재료는 토석혼축성이다. 둘레는 약 1.3㎞, 높이는 10m가량 되는 중급규모 산성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대구 동구청에서 남쪽 성문 입구에 8각 정자를 지어 대구시가지 전경을 잘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성문터는 산성의 서남쪽과 동쪽에 남아 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발견됐다. 성곽의 남서쪽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으며 달성, 검단토성, 봉무토성과 달리 삼국시대에 축성돼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된 곳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지역 의병과 왜군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현장으로 전해오나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공산성(公山城)으로 미처 피란하지 못했던 인근주민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 동북쪽에 임진왜란 때 팠다는 옥천(玉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다. 샘 주변에는 철성(凸城)을 쌓았다. 동구청에서 벤치 2개와 평상을 설치해 팔공산자락 환성산과 초례봉 등을 조망할 수 있게끔 했다.

◆용두산성

용두산성(龍頭山城)은 앞산자락 용두골 동남편, 신천 서편에 길다랗게 위치한다. 용두산성은 대구에서 청도로 가는 길목으로 좁고 긴 파동 계곡과 나란히 축성됐다. 이 성은 현재 신천대로 상동교지점에서 4차순환도로와 연결된 교각과 병행하고 있다.

성의 형태는 낙타 등처럼 돌출한 구릉을 정점으로, 그 둘레에 타원형으로 성벽을 쌓은 토석혼축성이다. 특히 동쪽은 낭떠러지로 천연요새다. 현재 북쪽 사면에 성벽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성 내부에는 장기적 농성을 할 수 있는 평지나 샘터가 없다. 달성이나 봉무토성처럼 취락을 보호하기보다 전쟁을 위한 잠정적 입보성(入保城)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남북 길이 약 150m, 최대 폭 약 50m, 둘레 약 400m로 저고도 산성이다. 용두산성은 인근 대명동고분군을 조성했던 취락집단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원삼국시대~삼국시대에 걸쳐 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1597년 9월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 권응수, 채선수 등이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오는 왜적을 달성에서 크게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당시 용두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팔거산성

대구시 북구 노곡동에 위치하는 팔거산성(八山城)은 노곡동산성, 독모성 등으로 불린다. 대구시기념물 제6호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성은 방티산이라고도 하는 함지산 정상 부근에 있다. 남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면이 모두 60도 이상의 가파른 지형이다. 동·남·북쪽은 자연절벽을 이용해 쌓은 토석혼축성으로 포곡식이다. 성의 높이는 10~20m나 된다.

함지산 정상은 해발 290m다. 정상에서는 금호강의 상류와 하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팔거산성은 천생산성과 연결된다. 가산산성이 구축되기 전까지 대구 북방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성벽의 길이는 1.5㎞ 정도다. 산성의 서쪽 중턱에 구암동고분군이 있어 그 지역에 살던 취락집단이 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축성 당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서편 성벽에 망루가 있고 일부에 석축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여러 차례 중수했다.

◆대덕산성

대구의 진산인 대덕산은 동남쪽으로 산성산과 비슬산으로 연결되고, 서북쪽은 낙동강과 금호강의 평야와 인접한다. 대덕산성(大德山城)은 대구시기념물 제7호로, 대구 근교에서는 공산성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이 성은 남구 대명동 대덕산 정상에서 북쪽의 안지랭이 계곡을 감싸며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앞산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의 둘레는 약 3㎞에 달한다. 자연암벽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산성으로 성 안에서 발견된 옛 그릇과 기와조각으로 미뤄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대덕산성과 관련되는 기록으로는 대구읍지에 ‘성불산유고성 금무(成佛山有古城 今無)’라고 하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불산 고성 재수성현 서10리석축 주3,051척 금폐(成佛山 古城 在壽城縣 西十里石築 周三千五十一尺 今廢)’라고 한 사실로 미루어 봐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앞산 케이블카 전망대 부근에 대덕산성 안내판이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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