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9]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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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7-24   |  발행일 2013-07-24 제20면   |  수정 2013-07-24
老선비는 유구히 푸름을 머금는 소나무를 닮으려 했으리라
‘만취헌’ 편액 글씨, 당대 명필 이진휴가 써…벼슬 마치고 귀향한 남노명의 지조와 유유자적 보여줘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9]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거처를 마련하면 대부분 그 당호(堂號)를 지었다. 당호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나 이상을 담았다. 그런 당호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만취당(晩翠堂) 또는 만취헌(晩翠軒)이다. 여기서 ‘만취’는 늦게까지 푸른,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푸름을 뜻한다. 이는 늙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삶의 지조를 비유한다.

‘만취’는 송나라 초기 재상으로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진 범질(范質)이 조카인 범고가 자신을 천거해 주기를 바라자 그에게 경계하는 글을 지어 주었는데, 그 내용 중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하게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는다(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소학에도 이 글귀가 나오는데, 그 전후 내용은 다음과 같다.‘만물은 성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고/ 융성함이 있으면 다시 쇠퇴함이 있나니/ 빨리 이룬 것은 견고하지 못하고/ 빨리 달리면 넘어질 때가 많은 것이다/ 활짝 핀 정원의 꽃은/ 일찍 피면 도로 먼저 시든다//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하게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는다/ 타고난 운명은 빠르고 더딤이 정해져 있으니/ 입신출세를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는 어렵다/ 제군들에게 일러 말하노니/ 조급히 나아감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니라.’

천자문에 나오는 ‘비파는 겨울에도 푸른 잎이 변하지 않지만, 오동나무는 그 잎이 일찍 시든다(批杷晩翠 梧桐早凋)’라는 글귀에도 ‘만취’가 있다.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벼슬을 마치고 고향집(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으로 돌아가 별당을 지어 안에는 ‘만취헌’이란 편액을 걸고, 밖에는 늦게 해안으로 돌아와 은둔한다는 의미의 ‘해안만은(海岸晩隱)’ 편액을 단 뒤 별세할 때까지 머문 영덕의 선비 만취헌 남노명(1642~1721)의 삶을 어떠했을까.

◆남노명이 귀향해 만년을 보낸 ‘만취헌’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근무하던 남노명은 폐비 민씨 사건으로 어지럽던 중앙의 정치환경에 환멸을 느끼고, 1693년 거창부사로 자원해 부임한다. 오로지 민생안정과 풍속교화에 매진하며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을 들은 그는 1698년 임기 5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귀향한 그는 종택 본채 옆에 대청이 있는 건물을 지은 뒤 당호를 ‘만취헌’이라 이름 짓고, 그것을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당호 편액 글씨는 당대 명필인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의 것을 받았다. 성재는 화엄사 ‘각황전’의 편액을 숙종의 명을 받아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그는 문신으로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성재는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남노명은 예조판서를 지낸 목임일과 생원시 합격 동기생인 인연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목임일이 자신의 사돈(이중환이 목임일의 사위)인 성재에게 ‘만취헌’ 편액 글씨를 써 주도록 주선한 것이다. 장중하고 반듯한 성재의 글씨는 당시 선비들이 선호했던 것 같다.

남노명은 때로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거들고, 고향 어른과 친구들을 만취헌으로 초대해 막걸리와 화전을 안주로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가할 때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사마광의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수시로 암송하며 자득(自得)의 경지를 누리며 보냈다.

만취헌은 이렇게 자신의 호와 같은 이름을 단 거처에서 80세까지 살다 이 세상을 하직했다.

만취헌중수기는 ‘공(남노명)은 손수 한 그루의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은 적이 없었는데도 뜻과 흥을 붙이고 의탁한 것이 바로 남산의 소나무와 북산의 잣나무였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추위가 심한 겨울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과 서리를 겪을수록 더욱 굳세지는 것은 유독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감당할 수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공의 의도는 이것을 취한 것이리라. 세상에 분을 발라 윤이 나게 하고 현혹시켜 눈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일체가 아름다운 꽃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것과 같지만, 소나무는 100년 200년 오래 살고 굵은 것은 동량이 되고 가는 것은 서까래가 되니 공의 의도는 이것을 사모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난고(남경훈) 종택의 정침은 난고 아들 안분당 남길이 지었고, 만취헌을 지은 남노명은 난고 남경훈의 증손자이다. 한편 남노명 집안은 보기 드물게 15대 350여년 동안 이어져오며 15명의 종손이 남긴 문집을 모은 ‘영산가학(英山家學)’이 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재 만취헌 건물 처마에는 또 다른 ‘만취헌’ 편액이 걸려 있는데, 당대 대구의 대표적 서예가인 회산(晦山) 박기돈(1873~1948)의 글씨다. 남노명 가문 후손으로, 회산의 친구인 남효구가 부탁해 받았다. 그 옆의 ‘해안만은’ 현재 편액은 항일운동가이자 글씨로도 유명했던 송홍래(1866~1953)의 글씨이다.

◆남노명이 만취헌에서 수시로 암송했던 ‘귀거래사’와 ‘독락원기’

남노명이 수시로 암송하던 귀거래사와 독락원기는 어떤 내용일까.

귀거래사는 동진(東晉)의 도연명(365~427)이 405년, 최후의 관직인 팽택현(彭澤縣)의 지사(知事) 자리를 버리고 고향인 시골로 돌아오는 심경을 읊은 시다. 제1장은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정신 해방으로 간주하여 읊었고, 제2장은 그리운 고향집에 도착하여 자녀들의 영접을 받는 기쁨을 그렸다. 제3장은 세속과의 절연선언(絶緣宣言)을 포함해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담았다. 제4장은 전원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3장과 4장을 읽어본다.

‘돌아가자/ 사귐도 어울림도 이젠 모두 끊으리라/ 세상과 나는 어긋나기만 하니/ 다시 수레를 몰고 나간들 무엇을 얻겠는가/ 이웃 친척들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 거문고와 글 즐기니 근심은 사라진다/ 농부들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서쪽 밭에 나가 할 일이 생겼다/ 때로는 천막 친 수레를 몰고/ 때로는 외로운 배 노를 젓는다/ 깊고 굽이진 골짝도 찾아가고/ 험한 산길 가파른 언덕길 오르기도 한다/ 물 오른 나무들 싱싱하게 자라고/ 샘물은 퐁퐁 솟아 졸졸 흘러 내린다/ 만물은 제철 만나 신명이 났건마는/ 나의 삶은 점점 저물어감을 느끼네// 아서라/ 세상에 이 몸 얼마나 머무를 수 있으리오/ 가고 머묾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무엇 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는가/ 부귀영화는 내 바라는 바 아니었고/ 신선 사는 곳도 기약할 수 없는 일/ 좋은 날씨 바라며 홀로 나서서/ 지팡이 세워두고 김을 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어보고/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본다/ 이렇게 자연을 따르다 끝내 돌아갈 것인데/ 천명을 즐겼거늘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9]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만취헌에 걸린 성재 이진휴 글씨 ‘만취헌’ 편액.

독락원기는 북송의 사마광(1019~1086)이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며 정원 ‘독락원’을 마련한 뒤 지었다. 세속을 초탈한 고상한 뜻을 품고 있어 후세의 많은 선비들이 그 뜻을 따르고자 했다.

독락원기는 도입부인 전사(前辭·정원의 구성과 독서당, 조어암 등을 설명)와 본문 격인 후사(後辭)로 구성돼 있다. 후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늙은이인 나는 평소 대부분 독서당에서 책을 읽는데, 위로는 성인을 스승으로 삼고 아래로는 여러 현인을 벗으로 삼아 인(仁)과 의(義)의 근원을 따져 보고 예(禮)와 악(樂)의 단서를 탐구한다. …정신이 고단하고 몸이 피곤하면 낚싯대를 드리워 물고기를 낚기도 하고,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고 약초를 캐기도 하며, 도랑을 파서 꽃에 물을 대기도 하고, 도끼를 가져다 대나무를 쪼개다가 뜨거운 물로 손을 씻으며 높은 곳에 올라 저 멀리 볼 수 있는 데까지 보면서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생각대로 거닌다. 밝은 달은 때맞추어 떠오르고 시원한 바람을 절로 불어오니 간다고 붙잡아 끄는 것도 아니고, 머문다고 그치는 것도 아니며, 귀와 눈과 폐와 창자가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혼자이면서 자유자재로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다시 어떤 즐거움으로 이런 것을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에 이런 아름다운 경치와 감상을 합해 명명했으니 독락원(獨樂園)이라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만취’를 애용한 조선의 선비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19]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만취당 조학신(1732~1800)이 지어 거처한 만취당(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의 대청에 걸린 ‘만취당’ 편액. 글씨는 해사 김성근이 79세 때 썼다.

‘만취’를 당호 또는 자신의 호로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에 있는 창녕조씨 고택인 만취당도 그중 하나다. 조선 정조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만취당 조학신(1732~1800)이 입향해 마련한 거처로, ‘만취당’은 사랑채 당호이기도 하고 그의 호이기도 하다. 이 고택 옆에 입향하면서 그가 조성한 소나무숲인 오계숲도 유명하다. 사랑채인 만취당 마루에 ‘만취당’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1835~1919)의 것이다. 해사는 조선 말기 문신으로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편액에는 ‘칠십칠옹 해사(七十七翁 海士)’라는 낙관 글씨가 함께 새겨져 있다.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도 ‘만취당’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인 김개국(1548~1603)의 세운 정자다. 만취당은 김개국의 호이기도 하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는 ‘만취당’이라는 대청 건물이 있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만취당 김사원(1539~1601)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에 세웠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큰 건물로 사가(私家)의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만취당’ 편액은 석봉 한호의 글씨다. 행주대첩의 주인공인 권율(1537~99) 도원수의 호도 ‘만취당’이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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