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퇴원을 원하는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은 건 지난해 12월19일 대통령 선거일 오후였다. 몇 달간의 두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왔고, 진찰 결과 ‘비 인두암’이 의심돼 하루 전 조직검사를 시행한 60대 환자였다. 퇴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통증이 좋아졌다며 환자가 강력하게 원해 약을 처방하고 퇴원하도록 했다. 그런데 환자는 다음 날 아침, 다시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왔다. 오후 회진 때 물어보니, 투표하기 위해 급하게 퇴원했다고 한다.
“면사무소에 들어가니 마감 10분 전이더라고. 직원이 나보고 대단하다고 했어. 그래도 내가 투표해 박근혜가 됐잖아. 하하하.” 그 말을 하는 동안은 통증도 잊어버렸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박근혜 후보는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환자를 매일 만나는 필자는 대선 공약 중 주로 보건의료 분야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박 후보의 공약을 보며 기대와 우려가 교차됐다. 분만 시설이 없는 지역에 공공 산부인과를 설치하고, 12세 이하 필수 예방 접종비를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은 마음에 들었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 약속도 기대되는 공약이다.
그런데 실제로 환자에게 부담되는 간병비용 등은 제외된다고 해 벌써 논란이다. 대다수 OECD 국가는 간병을 기본적인 의료서비스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박 당선인은 간병서비스를 포함한 4대 중증질환의 비급여 진료비를 모두 건강보험으로 전환해 환자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또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0%까지 높이겠다는 약속도 꼭 지켜야 한다.
반면 ‘어르신 임플란트 건강보험 공약’은 우려되는 공약 중 하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조원의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지금은 임플란트 보험적용보다 노인틀니의 본인 부담률 축소와 대상 나이의 확대가 더 시급하다.
박 당선인의 공약에 우리 사회 건강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 빈약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새 정부는 기초생활 보장 수급권을 더욱 확대해서 최소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빈곤층이 없도록 해야 한다. 빈곤층을 위한 의료급여는 가난한 사람을 공짜로 치료해 주는 제도가 아니라, 가난해서 건강이 나빠지고, 건강이 나빠져 더욱 가난해지는 가난과 질병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제도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박 당선인은 당선 소감에서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그런데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지난해 12월19일 발표한 국민 행복도 조사에서 한국은 148개국 중 97위를 차지했다. 새 대통령이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음을 뜻한다. 건강은 행복한 삶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의 삶을 꼼꼼히 보살피겠다’라고 유세에서 박 당선인이 약속한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국민의 건강까지 보듬을 때 진정한 국민 행복시대가 열릴 것이다.
청와대를 떠날 때 ‘의료민영화’와 같이 의료를 돈벌이로만 여기는 정책을 고집한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먼저 생각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추풍령 초입 고향까지 달려가 한 표를 던진 환자의 바람을 박 당선인은 잊지 말아야 한다.
<동산의료원 이비인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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