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은의 병원 에세이] 주치의 제도

  • 입력 2012-08-21  |  수정 2012-08-21 07:41  |  발행일 2012-08-21 제18면
[김동은의 병원 에세이] 주치의 제도

아주머니 한분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진료실 문을 나섰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다시 콧물이 나면 동네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는 필자의 말에 언짢아했다고 한다. 한때는 이런 일에 마음이 쓰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덤덤해졌다. 알레르기 비염처럼 동네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한 질병임에도 스스로 원해 대학병원을 찾는 환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아주머니를 진료하던 날 새벽에 런던 올림픽의 막이 내렸다. 가난을 이겨 낸 양학선 선수의 고난도 도마기술에 감동했고, 교통사고 후유증을 딛고 일어선 장미란의 바벨을 향한 마지막 입맞춤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편의 영화와 같았던 개막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무상의료제도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전세계에 자랑하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NHS 소속 간호사와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병상 옆에서 하나가 되어 춤추던 모습 속에는 자국의 공공의료제도에 대한 영국인의 자부심이 오롯이 배어 있었다. NHS는 빈부에 관계없이 의료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영국의 의료제도다. 이러한 영국 NHS의 성공 배경에는 오랜 역사의 주치의 제도가 있다.

주치의 제도란 국민이 주치의를 정하고, 종합적으로 건강관리를 받는 제도를 말한다. 영국 국민은 누구나 주치의를 둘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아플 때만 주치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건강 문제를 상담한다. 상급 병원으로의 전원도 주치의가 결정한다. 주치의는 자신에게 등록된 주민이 건강할수록 인센티브를 받는다. 진료까지의 긴 대기 시간 등 그동안 제기됐던 문제점은 여러 번의 개혁을 통해 개선됐다. 프랑스도 2005년부터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는 등 영국의 의료시스템은 이제 많은 국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복지가 정치권의 화두로 부상하면서, 주치의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 하에서는 전문적으로 1차 의료를 수련 받은 주치의가 환자의 치료를 책임지므로 환자는 적정한 시기에 적정한 치료를 받게 된다. 아울러 병이 발생한 특정 장기만이 아니라, 몸 전체에 대한 치료와 돌봄이 가능해진다. 또 주치의는 환자의 병력, 가족력, 사회경제적 상태에 대한 자료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은 자신의 증상에 따라 스스로 동네 병의원을 선택한다.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닥터쇼핑을 즐긴다. 이처럼 국민 의료 선택권은 높지만, 이러한 선택권이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됐다는 증거는 없다. 주치의 제도 하에서 당연히 주치의가 맡게 되는 질병예방과 건강관리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개개인에게 맡겨져 있다. 이 사각지대를 노린 대형병원은 수백만원짜리 건강검진 상품까지 진열해 놓고 불안한 마음의 국민을 유혹하고 있다.

주치의 제도는 OECD 국가 중 선두에 오를 정도로 심각한 우리의 의료비 증가 속도에도 제동을 걸 수 있는 제도다. 우리나라 의료비의 증가의 원인으로 일부 국민의 과다한 의료 이용과 일부 의사의 과잉진료가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 국민의 연간 의사 방문 횟수는 1인당 12.9회로 OECD 국가 평균 6.4회의 두 배를 넘고 있다. 주치의 제도가 시행돼 주치의가 ‘문지기’ 역할을 한다면 불필요한 중복 진료와 무분별한 대형병원 이용을 피해 의료비 증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2주전 외래 진료실에서 얼굴을 붉힌 아주머니도 평생 자신의 건강을 믿고 맡겨온 주치의가 있었다면 대학병원에서 1시간 대기하고 3분 진료받는 고생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주치의는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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