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은의 병원 에세이] 수면 빚

  • 입력 2012-03-13  |  수정 2012-05-24 12:01  |  발행일 2012-03-13 제18면
[김동은의 병원 에세이] 수면 빚
[김동은의 병원 에세이] 수면 빚

새 학기가 시작됐다. 병원 담 너머 고교 교정에 학생의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출근길에 만난 학생들의 눈빛도 작년에 비해 더 초롱초롱해졌다. 그 학생의 눈빛이 올해는 작년보다 공부를 더 잘해보겠다는 결심으로 읽혔다면 필자 또한 우리나라 입시지옥에 길들여진 때문일까.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새 학기엔 연례행사처럼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결심을 책상 앞에 붙였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면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 식의 ‘학급 급훈’ 수준 문구로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입시를 코앞에 둔 고3이 되면서 책상 앞의 문구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바로 ‘4당5락’. 그 당시 많이 유행했던 말로 4시간 자면 대학에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는 다소 비장한 뜻이었다.

평소 잠이 많았던 필자는 잠만 줄이면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수면 장애 환자를 치료하면서 수면에 대해 조금 알게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목표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평생 3분의 1을 잠자리에서 보낸다.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인 셈이다. 이런 수면은 하루 종일 수고한 몸속의 여러 장기가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성인에 비해 청소년 시기의 수면은 더욱 중요해 신체에 결코 부족해서는 안 되는 필수 비타민에 비유될 정도다. 성장에 필요한 각종 호르몬이 분비되고 병균이나 스트레스와 싸울 수 있는 면역력이 강화되는 시간이 바로 청소년기의 수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지옥에 내몰린 우리나라의 청소년은 불행하게도 만성적인 수면 부족 상태에 있다. 미국 국립 수면 재단은 청소년에게 최소한 8시간 이상의 수면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교생은 평균 5시간30분 정도 잠을 잔다. 4당5락이 진리처럼 회자되는 고3이 되면 이런 수면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부족한 잠은 고스란히 몸속에 빚으로 남게 되는데 이것을 ‘수면 빚’이라 한다.

수면 빚이 몸에 쌓이게 되면 주간 졸림 현상이 심해지고, 결국 학습능력의 저하로 이어진다. 최근 인천지역 2천383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시행한 연구에서 수면 빚이 적은 학생일수록 우수한 학업 성적을 보인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또 수면 빚은 금전적인 빚과 같은 특징이 있는데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전날 부족했던 수면 시간만큼 다음날 수면을 더 취함으로써 수면 빚을 갚게 된다. 그러나 우리 청소년은 빚을 갚을 시간도 없이 입시 공부에 내몰리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 누적된 수면 빚이 청소년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우리나라는 국가 채무로 고생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융 부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라나는 청소년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수면 빚이다.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청소년의 모자란 잠을 보충해주기 위한 수면 빚 보상 운동에 어른들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계명대 동산의료원 이비인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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