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하> 동북공정과 백포 서일 장군

  • 입력 2011-11-24 07:27  |  수정 2011-11-24 07:27  |  발행일 2011-11-24 제25면
우리 문화·역사를 지킨 백포의 정신 되새기자
조국이 일본에 주권 잃어버리자
독립운동단체 조직해 무력항쟁
북간도 중심으로 대종교 전파
발해 땅까지 회복하려는 큰 뜻

아직도 일본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중국은 발해와 고구려사 등에 대한 왜곡에 몰두하고 있다.

심지어 조선어까지 자국어의 일부라고 우기고 있으며, 우리의 아리랑을 UN 문화유산에 등재하여 자기문화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나아가 이어도 역시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를 중심으로 한국의 혼을 일깨워 우리나라와 우리문화·역사를 지키기 위해 무장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백포 서일 장군의 기상을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서일의 본명은 기학이고, 호는 백포로 함북 출신이다. 그는 조국이 일본에 주권을 잃어버리자 1911년 동만주 왕청현으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그는 권토중래를 꿈꾸며 교육과 육영사업에 헌신하면서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대종교에 몸을 담았다. 후일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이 그에게 교주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무력항쟁을 먼저 수행해야 하겠다는 이유를 들어 간곡하게 사양했다. 서일은 1911년 대종교 교도들을 중심으로 정식 체계를 갖춘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한다. 무오년(1918년)에는 대종교 교도들을 중심으로 발표된 대한독립 선언서(무오독립 선언서)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국내 3·1 독립 선언의 도화선을 만들어 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서일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광단을 대한 정의단으로 재편성했으며, 그해 8월에는 김좌진, 이범석 등을 맞아들여 이를 대한 군정서(북로 군정서)로 확대 개편했다. 그는 대한 군정서를 사상을 갖춘 무장단체로 훈련시켰다. 1920년 10월, 청산리 지역 부대 이동 도중 일본군 혼성부대인 동지대 37여단 소속 1만여명과 4일 동안 10여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려 대한민국의 기개를 만천하에 알렸다.

그 후 서일은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소련과 만주가 인접한 국경지역으로 이동한 뒤 10여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하면서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했다. 그는 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된 뒤 무장 독립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대한 독립군단의 주력이 노령 자유시에서 참변을 당하자, 서일은 밀산현 당벽진으로 옮겨가서 후일을 기다리며 수행과 연구에 전념했다. 이 와중에 1921년 8월26일 정체불명의 토비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그와 동행중이던 다수의 청년이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서일은 통탄을 금치 못하다가 다음날인 8월27일에 41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서일은 그의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지도력으로 청산리 전투의 총지휘를 맡는 등 실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우리 민족의 선구자였다. 또 통일 조국에서조차 남북 모두에 민족 정신을 고양한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받을 만하다.

그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북간도를 중심으로 대종교를 전파함으로써 민족정신 함양과 함께 단순한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넘어 우리 발해 고토까지도 회복하고자 하는 숭고한 뜻을 품은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만주벌 모든 독립 운동단체들이 집결한 대한 독립군단의 총재로 대표적인 무력항쟁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지도력을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41세로 생을 마감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가 한단계 도약을 기약하고 흩어진 독립진영이 재기해야 한다는 각성을 심어주기 위해 수도와 독립투쟁을 병행하는 지도자로서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다.

우리는 유사 이래 다시없는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기업과 우리의 젊은이가 다양한 분야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등 민족적 자긍심이 크게 제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여론이 좌파 우파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으며, 경제적인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서일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위기와 민족정체성의 와해를 숙연히 반성케 하는 원천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서일의 광명정대한 행동을 통해 조국애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고 그의 경천동지할 철학을 통해 인류애의 참다운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그러면 민족과 사회계층의 단합과 분단을 넘어선 통일, 그리고 나아가 우리 민족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그날이 가까이 올 수 있다.


서 훈<독립군총재 백포 서일 기념사업회 회장·前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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