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냥시대의 주거생활 토대는 숲 속일 수밖에 없고 아주 원시적인 주거 형태는 동굴일 수밖에 없었다. 위는 자연 그대로 덮여 있고 삶의 공간은 파져 있기 때문에 이 모양을 본 떠 ‘●(지붕 면)’에 파여 있음을 나타낸 ‘八’을 붙여 ‘穴(구멍 혈)’이라 하였다. 물론 애당초 절벽에 공간을 파 굴을 만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짐승과 같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땅굴에 들어가 생활한 것이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자연 굴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그 뒤로는 자연 굴보다는 인공 굴 속에 들어 살았기로 이를 ‘土室(토실)’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穴’에 ‘工(헤아릴 공)’을 붙이면, ‘토실’의 속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땅을 파낸 만큼 비었다는 뜻에서 ‘空(빌 공)’이라 하였고, 또 그 속은 대부분 몸을 구부리고 들어감에 공간적인 한정이 있기 때문에 ‘穴’에 ‘身(몸 신)’과 ‘弓(활 궁; 구부림의 뜻)’을 붙여 ‘窮(다할 궁)’이라 하였다.
인간에게 한계는 없는 듯 갖은 교만을 떨지만 그렇지는 않다. 완성을 나타내는 수는 ‘十(열 십)’이나 거의 완성에 가까이 가는 인간의 노력은 기껏해야 완성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九(아홉 구)’일 따름이다. 이런 뜻에서 ‘究(궁구할 구)’라 하였다. 즉 ‘하나’에서 ‘다섯’까지는 어떤 일이 자라나는 수로서, 이를 ‘生數(생수)’라 한다. 그러나 ‘여섯’에서 완성을 나타내는 ‘열’까지는 자라난 수에 하나둘씩 붙어 이뤄지는 수로서 이를 ‘成數(성수)’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노력이 지니는 한계는 ‘아홉’에 이르는 것이지 완성이란 없다.
이런 뜻에서 중용의 “진실 그 자체는 하늘의 도리지만, 진실을 향해 나가는 것은 사람의 도리다(誠者, 天道也 誠之者, 人道也)”라는 말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꽉 찬 하늘만이 완성을 나타낸 것인데 반하여, 오직 인간의 도리는 완성을 향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람이 몸을 의지해 살아가는 땅굴만 해도 그렇다. 추위를 피해 살아가려면 적당한 공간을 두고 막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만약 뻥 뚫려 있다면 적당한 삶의 공간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력에 의한 연구 역시도 항상 완성의 앞에서 멈춰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나날이 끊임없는 노력에 보람을 느끼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 알고보면 인간은 연구와 노력, 또 노력과 연구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이어져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개는 버젓이 대문을 열어 젖혀 놓아도 그 곳으로 출입하지 않고 거의 좁은 개구멍을 통해 출입하므로 ‘突(나아갈 돌)’은 좁은 제 구멍을 통해 밖으로 달아난다는 뜻에서 ‘나가다’는 뜻으로도 쓰고, 좁기 때문에 부딪친다는 뜻으로도 쓴다. 그러나 쥐는 이리저리 약빠른 짓을 다 하다가 막상 불리하게 되면 구멍을 파 놓고 그 구멍으로 살짝 달아나기 때문에 ‘竄(달아날 찬)’이라 하였다. 이런 경우 개구멍은 터진 구멍이지만 쥐구멍은 토실(土室)처럼 막힌 구멍일 뿐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뜻을 지닌 ‘孔(구멍 공)’은 ‘穴’과는 어떻게 다른가? 본디 ‘孔’이란 아이가 어미의 뱃속에서 나와 제일 먼저 매달리는 곳은 다름 아닌 젖이기 때문에 아이(子)가 ‘젖’에 매달린 모양을 그대로 본 떠, 바로 ‘젖구멍’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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