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FTA정국과 망각의존 정치

  • 입력 2011-11-09   |  발행일 2011-11-09 제30면   |  수정 2011-11-29
"밤새워 FTA 혜택 따지고 부작용을 토론한 이후 각자 양심과 확신 속에 당당하게 표결하는 모습 보이는 게 정치인의 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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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안보와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필자도 쟁점이 되고 있는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에 대해 잘 모른다. 짐작컨대 일반국민도 논쟁이 되고 있는 조항에 대해 이해를 하려면 FTA 특별과외를 받아야 할 것이다. FTA정국을 거치면서, 우리국민의 경제지식도 업그레이드 될 것 같다.

FTA정국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갑자기 ‘정치와 망각의존’을 생각해 봤다. 망각, 치매증이라는 말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단어다. 치매를 앓는 가족을 둔 가정의 집단적 고통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별, 병마와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해방되어 살 수 있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정치·군사적 충격도 70여일이 지나면, 보통사람은 전쟁상황을 망각하고 일상생활에 집중한다고 한다. 망각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FTA정국을 보면서 ‘정치와 망각’을 떠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과 FTA를 추진한 참여정부를 만든 일부 정치인들이 아이로니컬하게도 FTA비준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한·미FTA가 한·미관계를 군사동맹에서 경제동맹, 가치동맹으로 발전시킬 역사적 전기로 평가하고 홍보했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정치적 자산을 상속한 일부 정치인들이 FTA의 독소조항을 지적하고 비준을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솔직히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들 정치인이 국민의 집단적 망각을 너무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의 자유 속에서 FTA를 반대할 수도 있으며, 찬성할 수도 있다. 반대했다가 찬성할 수도 있으며, 찬성했다가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인이 아닌 주요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국가 주요정책에 대한 입장을 바꿀 경우에는 대의명분이 분명해야 한다. 적어도 그러한 태도변화를 지켜보는 국민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의 집단적 망각에 의존한 태도 변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병리현상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한다. 마약에 의존해서 생활하는 사람은 마약중독, 도박에 의존해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도박중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국민의 집단적 망각에 의존하는 정치를 ‘망각의존 정치’라고 부를 만하다. 국민의 집단적 망각에 의존하는 정치는 기본적으로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국민은 국회의원들이 밤새워 FTA의 혜택을 따지고, 부작용을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열띤 토론 이후에 당론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과 확신 속에 당당하게 표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당론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과 판단, 신념을 갖고 당당하게 표결에 참여하고, 각자의 선택에 대해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사실 국민 대다수는 복잡한 FTA전문을 구해 읽거나, 독소조항을 찾아내서 비판할 수 없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대의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FTA정국이란 거울 앞에서 정치인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무와 책무를 다시 성찰하기를 바란다. 집단적 망각에 의존하기보다, 국민의 집단적 기억을 두려워하는 정치를 대망한다. FTA괴담이 일시적으로 특정 정치입장을 유리하게 혹은 불리하게 할 수 있지만 가장 큰 폐해는 바로 정치의 존재이유를 소멸시키는 독약이라는 것을 정치인이 알아야 한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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