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삶을 영위해 온 집에 관한 역사는 아주 다양하다. 맨 처음에는 짐승처럼 천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에 들어 살았기로 이를 ‘혈거(穴居)’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동굴과 비슷한 움집을 지어 살았다가 나무로 얽고 풀로 덮은 움집은 뱀의 피해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막고 풀로 지붕을 덮은 집을 짓고 살았다. 따라서 삶의 토대도 애당초 숲속에서 산 밑으로, 다시 산 밑에서 들녘의 한 복판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살아가는 방법이 사냥에서 농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농경이 시작되자 모둠살이의 형태가 급기야 밭(田)을 토대(土)로 모여 사는 ‘里(마을 리)’가 이뤄지게 되었다.
이처럼 주거의 장소나 형태는 삶의 양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대가족이 한 울 안에 살았던 먼 옛날로부터 이미 ‘宮(집 궁)’이란 많은 가족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집을 뜻하는 글자였다.
즉 신분의 고하를 구분할 것 없이 일정한 울 안에서 동고동락하는 집은 한 울 안에 마치 등뼈가 일정한 간격으로 끊임없이 연결돼 있는 것과 같이 지붕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집을 통틀어 ‘宮(집 궁)’이라 일렀다.
그러다가 점차 사회가 신분의 고하로 나뉘게 되자 특히 ‘임금’이 거처하는 집과 임금을 제외한 일반 백성이 사는 집이 크게 차별화된다. 일반 사람들은 아무리 대가족의 식구가 많다 할지라도 대부분 돼지를 희생물로 삼아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家(집 가)’라 하였고, ‘宮’은 특별히 임금의 거처를 뜻하게 되었다.
흔히 신분이 높은 임금의 거처를 ‘九重宮闕(구중궁궐)’이라 말하는데 이때에 ‘宮’이란 궁을 에우고 있는 울안의 모든 건물들을 가리키는 글자임에 반하여,‘闕’은 궁 안의 출입에 걸맞지 않은 신분을 지닌 사람(欠;모자랄 흠)을 거슬러(逆;거스를 역) 버리는 대문(門)을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宮闕(궁궐)’이란 오늘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으로 비유하여 말하자면 임금이 정사를 부지런히 베푸는 ‘勤政殿(근정전)’과 정책을 구상하거나 논의하는 ‘思政殿(사정전)’ 등을 비롯한 모든 궁 안의 건물을 ‘宮’이라 말한 것이고, 궁 안으로 드는 ‘光化門(광화문)’을 비롯한 모든 문을 ‘闕’이라 말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10월5일 조선의 새 정궁인 경복궁이 완공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가 베풀어진 그 날 삼봉 정도전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 보는 곳이다.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장엄하게 하여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감동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궁의 이름을 시경 주아편에서 인용하여 ‘景福(경복)’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以景福)”라는 문구 중에서 두 글자를 따서 궁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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