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꽉 막힌 달구벌대로를 뚫고 대구스타디움 언저리에 도착하자, 거대한 함성이 스타디움 콘크리트를 뚫고 퍼져나왔다.
행여 놓칠새라 뛰어들어간 대구스타디움은 2천250룩스를 자랑하는 대낮같은 조명속에 6만여 관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빈자리가 보기싫을까 우려하며 동원된 시청 공무원들은 서서 보는 개막식이 더 즐겁다고 당당히 말했다.
초등학생 솔로이스트 김예음양(영신초등 4년)의 청아한 애국가가 숨죽인 관중들의 머리위를 휘감으면서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드디어 스타트했다. 애국심과 애향심이 뒤섞인 9일간의 열전이 시작됐다.
9월4일 밤 9시, 우레같은 함성속에 400m 계주 마지막 주자로 나선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는 마치 대구팬들에게 미안함을 갚으려는 듯 피니시 라인을 향해 질주했다.
이름모를 국가까지 합쳐 역대 최대인 총 202개 국가에서 1천945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이번 대구 대회가 우리 대구·경북민에게 던져주는 것은 무엇일까.
“너희들이 세계 지도에 대구(DAEGU)란 이름을 이제야 올렸다.” “대구의 도시 브랜드가 지구촌 곳곳 어딘가에 전해졌을 것이다.”
대구 대회 의미를 묻는 질문에 해외에서 온 주요 인사들은 이렇게 답했다.
덕담만은 아니었다. 이번 대구 대회는 ‘대한민국 지방도시 대구가 어떻게 하면 세계로 향할 수 있을지’의 의문에 실마리를 던진 단초였다.
바로 ‘지방이 어떻게 하면 글로벌화할 수 있느냐’는 문제(Glocalization)에 일견 해답을 던졌다.
국제무대에서 그동안 대한민국은 곧 서울(Seoul)과 동일시됐다. 외국인이라면 서울이 아닌 대한민국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 7월13일 세계물포럼 개최후보지 조사를 위해 대구에 온 물포럼 선정위원회 위원장 켄 리드(미국)는 “사실 한국의 수도 서울이 아니고, 왜 대구인가 의아했는데 와서 보니 대구가 신청한 이유를 알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육상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대회 붐 조성을 위해 수년전부터 사전 리허설로 열린 육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번쯤 대구에 온 유명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구가 처음 들어본 도시였다고 말했다.
육상대회가 끝났지만 미국 유력 신문 뉴욕타임스의 홈페이지 인터넷을 접속해 우사인 볼트를 치면 수십개의 기사가 뜬다. 기사 첫머리는 기자 이름이고, 이어 발신지가 나온다. ‘DAEGU, SOUTH KOREA’가 선명하다.
세계육상대회를 보도한 CNN, 한국의 KBS보다 더 중계를 많이 했다는 도쿄방송도 늘상 ‘여기는 대구 코리아’라고 끝을 맺었다.
일본의 자동차 회사 도요타의 상표가 더 커서 아쉬웠지만, 경기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의 가슴에는 ‘2011 DAEGU’가 선명했다.
일찍이 ‘DAEGU’란 지명이 이렇게 세계적으로 쓰여진 적은 없다. 육상대회는 그런 점에서 ‘대구의 명함’을 막 내민 사실상의 첫 무대였다.
65억~80억명으로 추산되는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도 무의식적으로나마 대구를 머리 속에 새겼을 것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대회 폐막 환송사에서 이번 대회의 의미에 대해 “대구의 부활을 알렸다. 더 크고 세계화된 도시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의 대구, 서울 거치지 않고 세계로 뻗을수 있다” 자신감
세계 일류 목표로 글로벌화 필요성 각인
국내에서의 대구 존재 어두운 이미지 탈피 계기…정치권 지원 늦었지만 대형 대회 성공 이뤄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메달은 고사하고 10개 종목에서 세계 10위권을 배출하겠다는 대한민국 육상의 목표는 이번 대구대회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출전 선수들 스스로가 아직도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자성했다. 세계적 마라톤 선수였던 이봉주씨를 비롯해 전문가들조차 “한국 선수들이 국내 전국체전 순위에만 매달려 세계로의 진출에 게으르다”고 질타했다.
한국 육상의 빈곤은 이번 대회 개최를 앞두고 대구시나 조직위의 최대 고민이었다. 국내 선수가 결선에도 못나가는 판에 누가 경기장을 찾을 것인가 하는 불안이 팽배했다. 표를 강매하다시피, 단체 구입을 독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권위주의 시대에나 발상이 가능했던 학생 동원령도 고육지책으로 나왔다.
반면 대회가 시작되자 관중 동원의 문제는 완전히 기우였다. 뒤늦게 대회에 관심을 갖게된 시민들은 표를 구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고, 먼저 경기장에 다녀온 이들은 가지 못한 이들을 향해 대회 칭찬에 열을 올렸다. 체험학습 동원령에 불만이던 학부모는 행복해하며 돌아온 자녀들을 보며 놀랐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한국 선수가 꼴찌인 대구 육상대회에 이렇게 열광했는가.
만약 이번 대회가 허접한 외국 선수를 불러다 놓고, 한국 선수들이 우승하는 장면이 연출됐다면 단연코 대구스타디움은 만석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만석이라도 질적 감동은 표출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메이카, 케냐, 미국, 프랑스 선수들에게 진정 박수를 보낸 것은 바로 ‘세계 일류, 세계 일류를 향한 최선’에 대한 찬사였다.
우동기 대구시교육감은 6일자 영남일보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세계 최고와의 만남이 현실적으로 이뤄졌다. 학생들이 살아갈 세계화 글로벌 시대에 저 먼 나라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와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내 눈 앞에서 달리고 던지고 할 때의 감격을… 내 꿈이 분명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구 대회는 우리가 세계를 보고, 세계 일류를 목표로 지향할 때 글로벌화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대구의 존재감
지난 6월14일 지금은 사퇴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대구시청을 찾았다.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성공개최와 상생 발전을 위한 대구시-서울시 업무협약 체결식’을 위해서였다.
당시 오 시장은 “대구 대회의 성공을 위해 서울시도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서울시가 보유한 교통방송, 9개 노선 지하철 광고를 통해 대구 대회를 홍보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육상대회는 국내 여타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대구시와의 관계와 연대를 새삼 생각하게 한 또 하나의 부수적 효과를 낳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서울 시장이 대구시청을 방문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대구시는 앞서 김범일 대구시장이 부산시를 찾아 허남식 시장과 협약을 맺었다. 영남권신공항 무산 이후 양측이 앙금을 일부 해소하는 자리였다.
이밖에 김두관 경남도지사도 대구를 찾아 지원을 약속했고 대전, 광주, 인천도 협약을 맺었다.
국내 다른 도시들이 대구 대회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한편 의문이기도 하지만, 이같은 협력체계는 그동안 왠지 고립된 느낌마저 든 대구로서는 일종의 돌파구였다.
대구시 관계자는 “지하철 사고 이후 대구에 어두운 이미지가 덧씌워져 걱정을 했는데 이번 육상 대회를 계기로 그런 인상을 바꿀 수 있게 됐다”며 “해외 브랜드 인지도도 중요했지만, 국내에서의 대구의 존재감을 새삼 알렸다는 데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방주의 대구
대구 육상대회를 코앞에 두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정부가 평창 유치를 놓고 베팅한 무한 투자 의지와 대구 대회에 대한 무관심이 새삼 비교된 것.
이명박 대통령은 평창 유치를 위해 직접 현지로 날아갔고, 이건희 삼성회장을 위시한 재계는 평창의 3번째 실패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지상명령인 것처럼 전력 투구했다. 더구나 정부는 평창 유치이후 고속철에다 도로 건설, 알펜시아 지원 등 전폭적인 지원안을 내놨다.
2007년 3월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유치전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읍소하다시피해 대구스타디움을 방문케하고 그 동영상을 아프리리카 몸바사로 가져가야 했던 대구로서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구 육상대회를 앞두고 대구를 찾은 정치권 혹은 정부 주요 인사들은 이같은 대구의 섭섭함을 전해듣고 놀라거나 내심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조해녕 조직위원장은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정부가 마치 3수해서 이제 갓 대학 들어간 아들만 귀여워하고 한번에 대학 간 장남은 거들떠보지 않는 형국”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나아가 정치권은 다소 늦었지만 대구 대회의 지원을 약속했고, 또 잇따라 스타디움을 방문하면서 힘을 실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구 대회는 수도권 일극의 대한민국에서도 지방이 독자적으로 세계적 이벤트를 개최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지방이 서울을 거치지 않고도 곧장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대구가 명실상부 선진국형 지방정부 주도의 국내 첫 대형 스포츠를 개최한 도시가 됐다는 점은 두고 두고 새겨질 것임이 틀림없다.
박재일기자 park11@yeongnam.com
박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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