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있다’는 말은 ‘없다’는 말과 상대되는 말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수렵시대에 ‘있다’는 말은 사냥감을 잡아 내 손안에 있다는 말로, 사냥감을 놓쳐 ‘잃었다’는 말과 상대가 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있다’는 말은 내 손으로 사냥한 먹이를 가졌다는 말로 ‘소유함’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손’에 고기를 지녔다는 뜻에서 ‘又’(또 우)에 ‘肉’(고기 육)을 덧붙여 ‘有’(있을 유)라 했다. 즉 ‘有’는 ‘所有의 有’였다.
이와는 달리 ‘잃었다’는 뜻은 손에서 일단 벗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에 ‘手’(손 수)에서 벗어났음을 뜻하는 ‘삐침’을 두어 ‘失’(잃을 실)이라 했다. 즉 손에서 벗어난다는 뜻은 ‘손아귀 안에 들지 않고 손 밖으로 벗어난 것’이므로, 삐침을 제외한 나머지 표현은 ‘手’가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원래 ‘有’와 상대되는 글자는 ‘無’가 아닌 ‘失’이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失’과 상대되는 글자는 ‘得’이요, ‘有’와 상대되는 글자는 ‘無’로 쓰이게 됐다. 그 까닭은 ‘유’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한 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소박한 원시 수렵시대를 지나 나라의 형태가 갖추어지게 되고, 자연과학적인 관심이 높아지게 되자 ‘有’에서의 ‘月’은 ‘고기’라는 뜻이 아니라 ‘달’을 뜻한 것이라고 풀어 ‘有’는 달을 손으로 가리듯, 월식 그 자체를 뜻한 글자로 쓰임이 바뀌기도 했다. 이렇게 ‘有’에 대한 풀이가 달라지자 ‘有’는 ‘失’과 상대되는 글자가 아니라 ‘無’와 상대되는 글자로 쓰이게 됐다.
그렇지만 원래 뜻인 소유의 ‘有’를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有’는 곧 ‘만유의 유’로 ‘만유의 근원’이 되는 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파악된 것은 글자 운용에 철학적 의미가 한층 깊어진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결국 형형색색으로 모양과 색깔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유형유색한 것을 ‘有’라 규정짓자면, ‘無’는 무형무색한 것으로 형색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주역’에서는 ‘上火下天’을 일러 ‘大有’라 했는데 이때의 ‘大有’란 소박한 뜻에서 ‘큰 소유’를, 곧 풍년을 뜻하는 말이다. 즉 하늘 높이 태양이 솟아 일조량이 많다 보면 그 해는 반드시 풍년일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얻어진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大有年’이란 풍년 자체를 나타내는 이름인데, 풍년의 가장 큰 필수조건은 일조량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조량이 적은 해는 자연히 흉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흉년에도 작물의 종류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첫째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고 쭉정이가 많은 해는 ‘饑’(주릴 기)라 하여 ‘기년’, 둘째 채소가 잘못된 해는 ‘饉’(흉년 근)이라 하여 ‘근년’, 셋째 과일의 결실이 좋지 못한 해는 ‘荒’(거칠 황)이라 하여 ‘황년’이라 했다.
아무래도 주식은 곡식이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도 곡식이 잘 익지 않은 해는 더욱 어렵고, 채소가 잘못된 해는 그 다음이며, 과일의 경우는 곡식과 채소 다음이기 때문에 흉년 중 가장 어려운 해는 ‘饑年’이며, 곡식과 채소가 다 같이 흉년인 경우를 ‘饑饉’이라 한다.
전해오는 말에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 以食爲天)고 했는데, 삼남지방에 기근이 들어 급히 수입한 것이 ‘고구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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