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이 대고구려를 세운 제1도읍 홀승골성 서성산(오녀산)과 배꽃이 핀 봄풍경. 사진작가 강위원 교수 촬영. |
◇… 2m 두께의 혹한기 흑룡강 우는 소리
봄이 오고 있다.
한국의 봄이 지금 대문간 쯤 와 있다.
그러나 백두산을 비롯한 그 너머 만주땅은 아직 하얀 강보에 싸여 막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 아기의 꿈결 같다. 특히 겨울철에는 영하 10~30℃ 정도 차이가 나는 한국땅과 만주땅의 기온만 보아도 얼마나 추운 곳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만주땅 최북단 흑룡강의 경우 겨울철 얼음 두께가 2m 이상. 4월말이 되어야 강이 풀린다고 한다. 그 얼음장이 녹으면서 깨어져 집채만한 얼음조각들이 떠밀려 내려오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백두산 호랑이 포효보다 더 크게 천지를 쩌렁쩌렁 진동시킨다.
한민족이라 하지만 우리와 조선족은 생활습관은 물론 언어, 문화예술 등이 많이 다르다. 우리는 한글 또는 한국어라 지칭하는데 그들은 '조선어'라 부른다. 한중 수교 이전에는 필연적으로 북한의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던 것 같은데 발음이나 표기가 북한과 동일하며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북한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노래 역시 북한스타일로 작곡되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족
우리는 조선족을 잘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조선족 역시 우리 한국정서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개념 하나로 동질성의 민족임을 떠들어대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 하리라. 한국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조선족으로 말하면 '소학교'가 되는데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을 배웠지만 그들은 소학교 때부터 '모택동'을 배운다. 이런 엄청나다면 엄청난 차이에서 오는 이념적인 사고부터가 우릴 혼란스럽게 한다. 북한은 소학교 때 김일성을 위인으로 배워왔을 것이고 보면 말이다.
또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선족은 민족과 국가가 다른 몸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행이 민족과 국가가 동일한 땅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조선민족 즉, 한민족이지만 어찌보면 불운하게도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다. 국적이 한국이 아닌 중국이다. 자유민주주의 국민이 아니라 사회주의 인민이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궤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만주땅을 우리 민족 시원의 땅이라 외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만 그러나 보라. 지금에 와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거대한 중국역사 속에 포함시켜 고구려 발해까지 속국이라 규명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던 고향땅과 고향집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남의 손에 넘어갔을 때 그것도 100년, 200년도 아닌, 1000년, 2000년이 지난 후 찾아가서 우리 할아버지의 땅이었다고 말해 보라. 기분 좋아할 주인이 어딨겠는가.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이러할 진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을 선조들께 돌려 원망만 할 게 아니라 제발 정신차려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에 투철한 백성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 고주몽이 세운 첫 도읍지 오녀산과 윤동주의 용정
내가 만주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99년 여름이었다.
그때 만주대장정이라 해서 한 바퀴 빙 돌았는데 가장 감명 깊었던 곳은 고주몽이 대고구려를 세운 첫 도읍지인 오녀산(홀승골성 서성산) 정상이었다. 그때, '우리는 백두산은 알고 오녀산을 왜 모르고 지냈는가?' 하는 엄청난 회한이 일기도 했다.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이라 하면 오녀산은 민족의 성산'이라고 내가 붙인 말이다. 앞서 밝힌대로 고구려를 우리 민족의 가장 강성했던 고대국가라고 목소리만 높였지 그게 만주땅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살아왔으니…. 나는 우리 역사에 큰 죄를 지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9차례에 걸친 나의 만주탐행은 어디에도 지원 받아본 적 없이 순전히 내 호주머니 돈으로 이뤄져 더 힘들었다. 조금만 여유가 되면 천만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만주땅을 밟았던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 있는 용정 땅과의 조우도 남다른 울림이 있었다. 용정 근처 천평들 끄트머리를 휘돌아 두만강이 흐른다. 천평들에서 수확되는 쌀은 품질이 우수하기로 이름나 있는데 '어곡미(御穀米)'라 부른다. 우리의 '경기도 이천쌀' 쯤 될까? 중국 청나라 황제께 바치던 쌀이라 해서 어곡미라 부르게 되었으며 '어곡전(御穀田)'이라는 말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만주땅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현재 살고 있는 조선족 풍습이나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들만의 문화라든지. 앞으로 백의민족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저 광활한 만주땅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낱낱이 제공할 것이다. <계속>
서지월시인=1955년 달성군 가창에서 태어남. 85년 문예지 '심상'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 99년 전업작가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수혜시인에 선정됨. 99년부터 6년간 9차례 만주 답사. 시집은 2002년 중국'장백산문학상'수상시집'백도라지꽃의 노래(白桔梗花之歌)' 등 다수.
어곡전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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