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맛길기행 .37] 麵 이야기 (9) 강산면옥의 흥망성쇠

  • 입력 2005-10-04   |  발행일 2005-10-04 제22면   |  수정 2005-10-04
(제자 : 蘭汀 李美蘭)
반세기 변치않은 그 맛…조리법 한두 사람이 독점 못하게 해
[경상도 맛길기행 .37] 麵 이야기 (9) 강산면옥의 흥망성쇠
사진 왼쪽 강산면옥의 김치말이 냉면. 오른쪽은 물냉면.

한국전때 北서 온 송씨 일가 개업
교동시장에 천막치고 장사할 땐
강사랑 · 박시춘 · 현인씨도 손님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는
부산 아닌 이곳에서 작사
초창기엔 한식형 대중요리집
세월 흐르면서 냉면만 남아

무리한 사업 확장 … 작년 파산
지금은 새로운 경영진이 운영


1953년 어느 날 피란시절 대구시 중구 교동시장 내 강산면옥.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이병주(원로 작곡가, 2·3대 경북연예협회 지부장), 가수 현인,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강사랑(초대 경북연예협회 지부장)이 강산면옥으로 냉면을 먹으러 갔다. 그때 강산면옥은 군용 천막 안에서 냉면을 팔았다. 대신동에 본점이 있었지만 그 무렵 이북 출신의 본거지격인 교동시장 내로 옮기는 게 더 장사가 잘 될 것 같아 현재 자리에 새 건물을 올리기 위해 터잡이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면을 다 먹기도 전, 아침부터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이던 강사랑이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끄집어내 부리나케 노랫말을 적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추억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1절이 터져나온 것이다. 강사랑은 천막 밖으로 나와 교동시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머지 가사를 완성해 박시춘에게 넘긴다. 박시춘도 자기 아내가 경영하던 현재 송죽극장 맞은편 국일다방 2층으로 올라가 신들린 듯 작곡에 몰두한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박시춘이 작곡한 그 노래는 현인이 불렀고, 그날 밤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통해 SP음반으로 취입된다. 이 귀중한 사실은 현재 동구 지저동 동림 홈타운 204동 401호에 살고 있는 원로작곡가 이병주옹(84)의 증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태생지를 부산으로 잘못 알고 있는 셈이다.

하여튼 강산면옥은 반세기 이상 지역민과 동고동락하면서 자연스럽게 향토 냉면의 대명사가 된다. 하지만 상당수 지역민은 강산면옥 초기 창업사에 대해선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것은 강산의 창업주 가계가 오랫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었던 탓도 있다. 그들은 냉면 얘기 외 자신의 가족사를 일절 외부에 공개하길 꺼렸다. 심지어 강산면옥의 창업주격인 송익두·원도일 부부는 언론 인터뷰도 무조건 거부했고 직원들한테도 함구령을 내렸다. 그건 자신들이 이북에서 내려왔고,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 자신들의 존재가 가능한 한 외부에 덜 알려지는 게 가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평양시 대동면 경제리에서 갑종 요리집을 경영했던 송진섭(송익두의 부친)·박진복 집안은 거기선 알아주는 요리 명가였다. 나름대로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기에 1·4후퇴 때 가솔 19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피란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 같다.

송씨 가문은 북한 사람답게 장사 감각이 남달랐다. 대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우선 대구 상권부터 파악했다. 사람이 많이 왕래하던 서문시장 한 켠 솥전 거리에 진을 친다. 하지만 간판도, 메뉴판도 없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싸고 간편한 한식을 팔기 바빴다. 그 중에 냉면도 섞여 있었다.

초창기엔 송진섭의 주도하에 차남 송익준·김선비 부부, 삼남 송익두·원도일 부부가 동업을 했다. 두 형제는 전쟁터로 나가야 했고 남은 가업은 아내들의 몫이었다. 후에 사업은 송익두·원도일 부부가 도맡게 된다.

강산의 역사는 51년 서문시장 솥전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잇단 화재로 인해 52년 현재 동산병원 정문 남측 상가 자리로 옮긴다. 이때 간판이 비로소 등장한다. '강산'이란 상호는 대동강, 모란봉 등 두고 온 고향 산천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동 61의 1 교동시장 내로 옮긴 건 58년, 이후 돈을 많이 벌어 79년엔 강산백화점까지 설립하고 그곳 3층에 본점을 둔다.

강산 바로 옆에 자릴 잡았던 남폿집도 강산과 필적할 정도로 유명한 냉면집이었다. 그래서 교동 골목은 '냉면 골목'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다. 남폿집 홍모 사장은 엄청난 재산을 모아 수성관광호텔 인수에 나서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훗날 식당업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선택한다.

강산을 냉면전문점으로 알고 있는데, 그건 아니다. 초창기 간판에 적혀 있듯 업태는 한식형 대중요리집이었다. 불고기, 숯불갈비, 국밥, 비빔밥, 갈비탕까지 팔았다. 다른 메뉴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라졌지만 냉면만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하다 보니 자연 냉면전문점처럼 보인 것일 뿐이다.

강산은 냉면 조리법을 한두 사람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대목이 송익두의 안목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그는 맛내는 걸 혼자만 알면, 고집스러워 유행에 뒤져 도태될 수 있고, 식당주와 요리사가 급사할 경우 맛의 대가 끊어질 우려가 있다고 해서 시스템적으로 맛을 관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인과 주방장은 바뀌어도 맛은 자동적으로 전승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97년부터 체인사업을 시작할 때도 자기 맘대로 조리법을 바꾸는 자에겐 체인점을 절대 안 주었다. 워낙 폭넓은 골수 단골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인점 주인이 맛을 맘대로 변형시킬 수가 없었다.

85년엔 송익두, 맘씨 좋은 아내 원도일도 2003년 타계한다. 가업은 장남 송관백을 거쳐 손자 송국도에게로 넘어간다. 하지만 송국도는 너무 과잉 투자를 했다. 93년 대백프라자점, 96년 동아백화점 수성점에 이어 97년 체인점 1호를 포항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세운다. 2000년 들어 체인점이 36개로 증가하면서 북구 산격동에 강산식품까지 설립한다. 내친김에 서울 신사동으로 진출, 20여억원대의 업장까지 짓는다. 하지만 소비위축과 경기급락 등으로 인해 2004년 파산하고 만다. 이로써 반세기 강산의 신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물론 송씨도 강산에서 완전 손을 떼게 된다. 하지만 교동 본점의 불씨는 죽지 않았다. 2002년 3월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서 강산의 제2 도약을 가꿔가고 있다.


☞강산면옥 물냉면 만들어 보세요

▶육수는 살코기와 사골로 곤다. 핏물을 말끔히 제거한 후 센 불에 고아낸 고깃국물에 간장, 천일염, 마늘, 무, 파 등의 양념과 특유의 소스로 빚어낸 육수는 특수 제조된 육수 보관고에서 숙성돼 공급된다. 현재 육수 맛의 균일화를 위해 북구 산격동 유통단지 내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육수는 체인점으로 직접 공급된다.


▶냉면 사리는 고구마 전분과 메밀가루를 혼합해 빼내는데, 전분과 메밀 혼합 비율은 계절과 기온 습도의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빼낸 면은 잘 삶은 뒤 매우 찬물에 씻어 면발을 쫄깃하게 만든다.

▶냉면 용기도 냉면의 온도 유지를 위해 중간에 공기층이 있는 이중기를 쓴다. 냉면용 김치, 배, 오이, 홍고추, 삶은 계란과 소고기 편육을 고명으로 얹은 뒤 육수를 붓는다.

▶강산은 2002년까지 북한식 꿩냉면을 냈지만 수요가 들쭉날쭉하고 육수 변질 등이 우려돼 지금은 팔지 않는다. 현재 냉면류는 물·비빔냉면, 김치말이 냉면, 함흥식인 회냉면이 주종이고, 96년부터는 가족단위 손님을 겨냥해 쟁반냉면도 개발했다.

[경상도 맛길기행 .37] 麵 이야기 (9) 강산면옥의 흥망성쇠
1952년 동산병원 정문 남측의 강산면옥
[경상도 맛길기행 .37] 麵 이야기 (9) 강산면옥의 흥망성쇠
1960년대 교동시장 내 강산면옥.
[경상도 맛길기행 .37] 麵 이야기 (9) 강산면옥의 흥망성쇠
현재 강산면옥이 입점해 있는 강산백화점 전경.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AI 활용, 디지털 아티스트 진수지

더보기 >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