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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가축들의 순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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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뉴스팀기자
  •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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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기형도,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기형도, ‘식목제’)

누군가 말이 가장 영성을 지닌 눈빛을 가졌다고 하더군요. ‘가축들의 순한 눈빛’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말이겠지요. 요즘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제 눈빛에 흠칫 놀랍니다. 시 쓰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를 거기서 알아채기 때문이지요.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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